물은 화학적으로 매우 간단한 분자들로 이뤄져 있지만, 그 물리적 특성은 매우 복잡하다. 따라서 물의 이론 모델을 정교하게 정립하는 일은 물리, 화학 등의 기초과학뿐만 아니라 생명공학 등 공학 분야에서도 막대한 파급 효과가 있다. 알면 알수록 오묘한 세계, 물에 대해 들여다보자.
필자가 대학생 때의 일이다. 한 전공 수업을 듣는 중이었는데, 교수님께서 당시 자신이 수행하던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열변을 토하다가 그 비교 대상으로 물(H₂O)에 관한 연구를 언급하셨다.
교수님 왈,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물 같은 것을 연구하고 있나. 하긴 물도 중요하지. 없으면 목도 마르고….” 아마 교수님은 초전도체(낮은 온도에서 저항이 0이 되는 물질), 초끈이론(물리적 최소 단위를 끊임없이 진동하는 끈으로 기술해 우주와 자연의 근본적인 원리를 밝히려는 이론) 같은 당시의 최첨단 분야에 비하면 물은 매우 시시한 연구 주제라 여기신 듯하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필자가 대학생이던 시절에 비해 놀랄 정도로 과학적, 공학적 진보가 이뤄졌다. 예를 들어, 태양계 밖에서 보내오는 매우 미약한 중력파를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력과 분석력을 확보했으며,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던 높은 수준의 지적 활동을 인공지능을 탑재한 컴퓨터가 넘보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런 최첨단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물은 이전보다 더 시시한 주제로 보여야 마땅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과학적 측면에서 물은 점점 더 ‘오묘’해지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물의 흥미로운 물리적 특성
물의 오묘함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는 일반적인 물질의 상태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질이란 분자(혹은 원자)들이 모여 있는 것으로 통상 고체, 액체, 기체 상태로 나뉜다.
고체 상태의 물질은 분자들 사이를 가까이 묶어두는 상호작용이 열적 운동 에너지보다 훨씬 강해 분자들이 서로 오밀조밀 모여 있는 딱딱한 상태다. 이에 반해, 기체 상태는 상호작용에 비해 열적 운동 에너지가 훨씬 커서 각 분자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움직이고 있는 상태다.
액체 상태는 고체와 기체의 중간쯤으로, 분자 간의 상호작용과 열적 운동 에너지가 비슷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는 상태다. 이로 인해 액체 상태에서 분자들은 고체 상태처럼 서로 가까이 있지만 서로에게 단단히 묶여 있지는 않아서 ‘출렁출렁’한 특징을 나타낸다.
이렇게 물질의 상태는 분자 간의 상호작용과 열적 운동 에너지 간의 경쟁과 균형에 의해 결정된다. 물이 다른 물질들에 비해 특별히 흥미로운 물리적 특성을 보이는 이유도 바로 물 분자들 간의 상호작용이 오묘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물 분자는 산소 원자 주변에 두 개의 수소 원자를 공유결합으로 달고 있으며, 결합되지 않은 전자쌍을 두 개 지니고 있다. 이렇듯 물 분자는 본래의 모습이 선천적으로 비대칭적이어서 두 분자 간의 상호작용은 바라보고 있는 두 분자의 방향에 따라 변화무쌍하다.
또한 물 분자는 지니고 있는 산소 원자의 높은 전기 음성도로 인해 주변의 물 분자와 수소결합을 할 수 있다. 하나의 물 분자는 주변 물 분자와 최대 4개의 수소결합을 이뤄내 3차원 공간에서 정사면체(tetrahedral) 구조를 만들어내는 게 가능하다. 이러한 물의 상호작용에 관한 특성들은 온도나 압력에 따라 미묘하게 변한다. 이로 인해 고체 상태의 얼음이 액체 상태의 물에 뜨고, 과냉각 물(어는점 이하에서 얼지 않고 액체 상태로 남아 있는 물)의 주요 물리적 특성이 비정상적으로 커지는 등 다른 액체들과는 매우 다른 특이한 성질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영하 150℃에서 액체 상태의 물
물 분자들 간의 상호작용은 현재 물리·화학적 지식과 첨단 컴퓨터 계산기법을 총동원하더라도 정확히 예측해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섬세하다. 대신 실험적 기법의 고도화로 인해 20년 전에는 불가능했었던 물의 독특한 물리적, 화학적 특성에 관한 실험이 현재는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물에 관한 연구가 더욱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것이 물이 20년 전에 비해 한층 오묘해지고 있는 이유다.
일례로, 최근 필자는 압력을 정교히 조절하면서 물을 얼리면 영하 150℃에서도 액체 상태의 물을 유도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밝혀냈다. 이 연구 결과는 물의 특성을 설명하는 정교한 이론적 모델을 수립하는 데 중요하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물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지는 이유는 비단 지적인 측면에서 흥미롭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를 테면 일상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구름의 생성이나 비와 우박의 생성 기작은 여전히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남아 있다. 물의 오묘함을 풀어내야만 이들 현상의 원리도 명쾌하게 밝혀낼 수 있다.
공학적으로는 거친 환경에서 구동되는 기계의 내부와 표면에서 일어나는 물의 응결과 빙결 현상을 해결해야 한다. 이런 난제를 푸는 일도 물을 얼마나 이해하는지에 달려 있다. 생물학적 측면에서는 단백질의 기능 발현에 필수적인 단백질 내부 물 분자의 동역학적 움직임은 여전히 매우 도전적인 연구 영역으로 남아 있다.
이렇듯 물은 오묘하며, 물 연구는 중대하다. 필자와 함께 물의 오묘함에 대해 중대한 연구를 해보고 싶은 분들은 UNIST로 오길 기대한다.
글: 자연과학부 김채운 교수(http://hiprex.unist.ac.kr)
김채운 교수는 고압력 과학(HIGH-PRESSURE SCIENCE), X-선 과학(HIGH-PRESSURE SCIENCE), 단백질 과학(PROTEIN SCIENCE)을 전문으로 연구하고 있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미래창조과학부 중견연구자지원사업(핵심 연구)에 참여해 물의 상전이와 물-단백질의 상호 작용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왔으며, 2018년부터는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의 지원으로 극저온 액체 상태의 물에서 발현되는 새로운 생명현상에 관해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