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생체시계의 비밀을 밝힌 세 과학자(제프리 홀, 마이클 로스배시, 마이클 영)에게 돌아갔다. 수면이나 체온, 혈압, 호르몬 분비, 음식 섭취와 대사작용, 뇌기능(인지, 학습, 기억) 등 매일 반복적으로 변하는 생리현상을 조절하는 생체시계 유전자를 찾아내고 이들의 작용 모델을 최초로 확립한 공로다.
최신 기술을 이용한 분자 실험 기법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고 있다. 이런 시대에 ‘유전학’이라는 분야는 매우 고리타분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전학은 1953년 왓슨과 크릭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내기 90여 년 앞서, DNA가 유전물질로 작용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시기부터 시작됐다. ‘현대 유전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멘델이 그의 소중한 완두콩 실험을 통해 개체의 여러 성질이 어떤 원리로 부모에서 다음 세대로 유전되는지 밝혀내면서부터다. 이처럼 유전학은 과학자들이 논리적 가설과 실험적 분석으로 생명현상의 근본 원리를 제시할 수 있는 강력한 실험도구로 지금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한 세 명의 과학자들이 사용한 비밀 무기도 바로 이 유전학이다.
행동유전학의 아버지, 시모어 벤저
1960년대 말 미국 캘리포니아공대(Caltech)의 시모어 벤저 박사는 학습, 기억 등과 같은 다양한 신경유전학적 행동을 조절하는 원리를 밝히기 위해 초파리를 모델로 활용한 매우 단순한 실험을 설계했다. 먼저 초파리 염색체의 염기서열에 무작위로 돌연변이를 일으켜 특정한 행동에 변화를 보이는 돌연변이 초파리를 찾아낸다. 이후 각 돌연변이 초파리에 나타난 유전자 변형을 밝혀내면, 특정 동물 행동을 정상적으로 조절하는 데 필요한 유전자들을 찾아낼 수 있다고 가정한 것이다.
이 실험기법은 ‘전위유전학(forward genetics)’이라 불리는데, 당시 다른 과학자에겐 환영받지 못했다. 복잡한 형태의 동물 행동이 단순히 유전자 하나의 돌연변이로 영향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현대 과학 초기 생화학자들은 DNA(염기서열 4개)보다 단백질(아미노산 20개)이 복잡한 유전현상을 설명하는 유전물질로 작용할 것이라고 믿기도 했다.
하지만 벤저 박사와 대학원생 로널드 크놉카는 자신들의 방법으로 기념비적 논문을 발표했다. 24시간 주기의 생체리듬이 파괴된 생체시계 돌연변이 초파리를 세계 최초로 발견했고, 이 돌연변이 초파리에서 변형된 최초의 생체시계 유전자를 ‘피어리어드(period)’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 연구는 고전적 유전학 기법과 각 초파리의 주기적 움직임을 정량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실험기술이 융합되면서 이룩해낸 획기적인 성과였다. 그리고 이 발견이 2017년 노벨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자들의 업적에 근간이 됐다.
생체리듬의 분자유전학적 원리 발견
노벨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자인 홀, 로스배시, 영 박사는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에 걸쳐 ‘블랙박스’ 같았던 생체시계 유전자들을 발견했다. 아울러 이들 유전자의 유전정보가 24시간을 주기로 RNA 전사되고 단백질로 번역됨으로써 일주기적인 생체리듬을 유지하고, 하루 일과 시간에 따라 우리 몸의 여러 생리현상을 효과적으로 조절한다는 ‘전사-번역 되새김 고리(transcription-translation feedback loop)’의 분자시계 모델을 확립했다.
이 모델의 핵심은 다음 5단계다. ① 먼저 저녁 무렵 시작되는 전사 활동을 통해 피어리어드 유전자의 유전정보에서 만들어지는 피어리어드 RNA의 양이 증가한다. ② 밤 시간 동안 RNA 번역을 통해 세포질 내에 피어리어드 단백질이 축적되고, ③ 새벽 무렵 피어리어드 단백질이 생체시계 유전자 타임리스 단백질과 결합해 세포핵 안으로 유입되면서 피어리어드 유전자 자신의 전사 활동을 방해한다. ④ 이에 따라 낮 시간 동안 피어리어드 RNA와 단백질의 양이 감소한다. ⑤ 결과적으로 이러한 피어리어드 유전자의 전사가 저녁 무렵부터 다시 활성화되는 과정이 24시간을 주기로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이후 많은 후속 연구로 세 개의 ‘전사-번역 되새김 고리’로 맞물려 있는 개선된 분자시계 모델이 확립됐다. 또 초파리뿐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동물 모델에서 이 같은 분자시계의 원리가 공통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도 발견됐다.
재밌게도 피어리어드 유전자 이후 새로 발견한 생체시계 유전자에는 시간을 의미하는 특별한 이름을 지어주는 전통이 이어졌다. 홀 박사와 로스배시 박사팀이 발견한 ‘클락(clock)’, ‘사이클(cycle)’, 마이클 영 박사팀이 발견한 ‘타임리스(timeless)’, ‘더블타임(doubletime)’, 그리고 필자의 연구팀이 발견한 ‘클락워크 오렌지(clockwork orange)’, ‘투웬티-포(twenty-four)’ 등의 생체시계 유전자들이 대표적이다.
생체리듬 연구 이끄는 로스배시 패밀리
로스배시 박사는 70세가 훌쩍 넘은 나이에도 생체리듬 연구 분야를 이끌고 있다. 2000년대 중반에는 아침과 저녁, 혹은 계절 변화에 따라 초파리의 일주기적 활동성을 차별적으로 조절하는 생체시계 신경세포인 아침신경세포(morning cell)와 저녁신경세포(evening cell)를 보고했고, 이로부터 ‘두 개의 진동자 모델(two oscillator model)’이라 불리는 생체시계 신경세포 회로의 새로운 작용 모델을 제시했다.
또 2000년대 후반부터는 새롭게 개발된 대용량 염기서열 분석과 분자유전학적 기법을 활용해 24시간 주기의 생체시계 유전자 기능과 해독에 중요한 새로운 분자생물학적 원리들을 규명했다. 최근에는 광유전학과 신경세포 활성 이미지 기술을 활용해 수면에 중요한 신경세포 회로와 작용 원리를 밝혀냈다.
로스배시 박사의 왕성한 활동과 업적은 Caltech(화학)과 MIT(생물리학)의 학위 과정에서 공부했던 전공 융합에서 나온다고 본다. 더불어 그의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박사 후 과정 및 대학원생들의 다양한 과학적 배경, 끊임없는 과학적 질문과 호기심,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가설과 기술로 해답을 찾는 치열한 노력의 결과물이기도 할 것이다.
글 생명과학부 임정훈 교수
임정훈 교수는 박사과정에서 바이러스학을, 박사 후 과정에서는 초파리를 이용한 생체리듬과 수면주기를 연구주제로 삼았다. 2013년부터 UNIST 교수로 재직하며 단백질 번역이라는 근본적인 생명현상을 풀어내는 연구를 하고 있다. 늘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 결과 제1회 서경배신진과학자로 선정되며 국내외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