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ST는 2018년 THE 신흥대학평가 밀레니얼 대학(2000년 이후 개교) 부문에서 아시아 1위, 세계 6위에 올랐다. 논문의 질을 평가하는 라이덴 랭킹에서도 2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연구의 질을 강조해온 전략이 효과적이었음을 방증하는 결과다. UNIST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수출형 연구브랜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수출형 연구브랜드 사업은 인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연구를 선정하고, 적극적으로 사업화해 수출 가능한 신산업을 육성하는 프로젝트다. 현재 14개 중점연구를 중심으로 연구브랜드 사업이 추진 중이다. 이번 호에는 사업화 부분에서 가장 앞서고 있는 연구브랜드 세 가지를 소개한다.
유니브레인,인간 뇌 모방한 초저전력 신경망 칩
김경록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교수
2016년 알파고 쇼크를 일으켰던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승부에는 숨겨진 사실이 하나 있다. 비록 알파고가 화려한 승리를 거뒀지만, 에너지 측면에선 이세돌이 한 수 위였다는 점이다. 이세돌 9단은 20W의 에너지만 소모한 데 반해 알파고는 170㎾라는 막대한 전력을 사용했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해도 너무 많은 전력을 쓴다면 곤란하다. 이런 이유로 최근 반도체 패러다임은 소형화에서 소모 전력을 줄이는 방향으로 전환됐다.
소모 전력을 줄이는 궁극의 방법은 인간의 뇌신경을 모방한 뉴로모픽(Neuromorphic). 하지만 현재 뉴로모픽 반도체 기술은 모두 2진법 CPU(Central Processing Unit)·GPU(Graphics Processing Unit)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여전히 방대한 양의 전력이 필요하다. 인공지능이 빅데이터를 처리하려면 엄청난 전력이 소모될 터. 따라서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본격화되기 전에 반드시 전력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에 김경록 교수는 3진법에 기반을 둔 차세대 반도체 소자(Ternary CMOS, T-CMOS)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바로 차세대 컴퓨터 프로세서인 ‘유니브레인(UniBrain)’이다.
“인간의 뇌는 기본적으로 3진법 신경망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확실히 모르는 상태(0), 확실히 아는 상태(2), 아는지 모르는지 불분명한 상태(1)로 말입니다. 신경을 모방하는 뉴로모픽이 불분명한 상태를 간단히 처리할 수 있다면 신경망 시스템 복잡도를 혁신적으로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2진법에서 3진법으로, 디지털 패러다임 대 전환
유니브레인은 UNIST에서 추진하는 수출형 연구 브랜드 중에서도 10조 원 이상의 기술 가치를 내다보는 가장 시장성이 큰 분야다. T-CMOS 소자 개발을 비롯해 소재, 회로, 시스템, 어플리케이션 등 그야말로 디지털 패러다임의 판도를 바꾸는 ‘퍼스트 무브(First Move)’형 연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존 2진법 CMOS 소자의 구조 및 공정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고, 사물인터넷(IoT) 지능형 시스템, 생체모사 소자, 웨어러블 스마트 기기, 지능형 로봇, 무인 항공기 및 미래 자동차 등 산업적 파급력도 메가톤급이다.
“최근 T-CMOS의 파운드리(Foundry, 반도체 수탁 제조) 웨이퍼 레벨(Wafer Level) 양산 가능성을 성공적으로 검증했습니다. 유니브레인 시스템 상용화에 보다 가까워져 한껏 고무된 상태입니다.”
유니 브레인 개발은 소자 수준부터 시스템까지 일괄적으로 진행되는 전방위 연구다. 수출형 연구브랜드 과제로 선정돼 김경록 교수팀 외에도 10여 명의 교수진이 소재, 소자, 회로, 시스템과 어플리케이션을 포괄하는 유니브레인 연구를 진행 중이다. 각 단계의 요소기술의 특허 등 지적재산권을 획득하고, 이를 통한기업 펀딩 및 기술 투자를 유치해 상용화를 앞당긴다는 전략이다. 최근에는 특허법인과 함께 원천특허 포트폴리오도 구축하고 있다. 더불어 올해 안으로 스타트업을 설립할 계획이다.
지난해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은 저전력 반도체 설계 회사인 암(Arm)에 34조 원을 투자했다. 김경록 교수는 “이미 선진 기업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분야”라며 거침없는 포부를 밝혔다.
“앞으로 인텔, 삼성, 암, 퀄컴의 4개 업체를 모두 합친 반도체 회사 이상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이 정도면 가히 수출형 연구 브랜드라 할 만하지 않나요?”
침묵의 살인자 췌장암을 진단할 차세대 내시경
양준모 생명과학부 교수
전자레인지에 팝콘을 튀기면 펑펑 팝콘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난다. 이렇게 물질이 빛을 흡수하면서 그 에너지가 초음파로 변환되는 현상을 ‘광음향 효과(Photoacoustic Effect)’라 한다. 광음향 효과를 내시경 기술에 적용하는 방법을 2009년 세계 최초로 제시한 인물이 양준모 교수다.
“광음향 내시경술(Photoacoustic Endoscopy, PAE)은 생체 조직에 레이저 펄스를 쏴 조직 내부에서 초음파를 유도한 후, 그 초음파 신호를 검출해 생체 내부의 단층 영상을 얻는 새로운 방식의 내시경 기술입니다.”
현재 병원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내시경은 비디오 내시경(또는 연성 내시경)인데, 생체 내부를 면밀히 살펴보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0~40년 전 초음파 내시경이 등장했지만, 대조(Contrast)가 선명하지 않아 주요 병변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이미지 상으로 구분이 되려면 음파의 반사도(Echogenicity) 측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가져야 하는데 이 부분이 부족한 것이다. 예를 들어 췌장암 조직처럼 병변이 일정 수준 이상 진행되지 않는 한, 정상 조직과 별 차이가 없어 조기 진단이 어렵다. 그래서 췌장암이 ‘침묵의 살인자’로 악명이 높은 것이다. 이에 반해 광음향 내시경은 빛의 흡수도(Optical Absorption) 차이에 따른 이미지 대조를 제공하기 때문에 훨씬 더 선명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광음향 내시경을 이용하면 췌장암처럼 진단이 어려운 암 조직도 조기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암의 주요 전이 경로인 혈관과 림프관도 매우 선명하게 볼 수 있어 암의 병기 판단(Cancer Staging)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국내 첫 내시경 산업의 태동을 꿈꾸며
최근 양준모 교수의 관심은 ‘임상요건 충족’에 쏠려 있다. 광음향 내시경이 실제 임상에서 유용하게 쓰이도록 현재의 초음파 내시경만큼 크기를 축소하고, 음향 이미지와 초음파 내시경 이미지를 결합한 형태로 시스템을 새로 디자인해 관련 기기들을 개발하고 있다. 또 사업화를 위해 6건의 특허를 출원했고, 앞으로 보다 강력한 특허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계획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구현해 의학적 효용성을 증명하는 일. 현재 고려대학 의과병원, 서울 아산병원 등 주요 병원들과 다양한 형태의 임상실험을 진행하며 구체적으로 어떠한 쓰임이 있을지 적용 분야를 발굴하고 있는 중이다.
“원천 특허와 의학적 효용성이 증명된다면 사업화 성공은 자연히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의학 발전에 상당히 기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국내 의료기기 산업에서 내시경 분야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습니다.”
현재 국내 병원에서 사용하는 내시경은 전량 수입 제품이다. 의료기기 산업이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부상한 지 오래지만, 우리나라는 내시경 산업의 불모지나 다름없다. 때문에 양준모 교수의 연구가 상용화되면 국내 기술로 만들어진 최초의 내시경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하루빨리 시제품을 완성하기 위해 경주하는 이유다.
해수전지, 어디까지 왔나?
김영식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교수
지난 5월 인천에서 열린 국제항로표지협회 컨퍼런스 산업전시회는 김영식 교수와 ㈜우리해양이 공동 개발한 ‘해수전지 등부표’가 세상에 첫 선을 보인 자리였다. 어두운 밤바다를 밝히는 등부표는 그동안 납축전지를 사용했는데, 바닷물에 젖으면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해수전지는 바닷물을 이용해 전기를 저장하기 때문에 해양 환경에서도 문제없다. 이번 전시 제품은 해수전지가 우리 생활 속에서 어떻게 쓰일지 보여준 첫 사례라 업계 관계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실제 해수전지를 사용할 수 있는 곳에서 유용성을 인정해준 것이라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등부표는 해수전지를 정말 필요로 하는 사용처이니까요.”
이는 2014년 해수전지 연구를 시작한 이래 4년 만에 거둔 쾌거다. 본격적인 시판을 위해서는 다양한 환경에서 시험한 후 제품 안정성을 높여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하지만 해수전지는 UNIST 수출형 연구 브랜드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사업화에 다가서고 있는 선도적 모델이다.
작은 셀에서 시작된 메가와트급 ESS 개발
해수전지는 바닷물을 이용해전기에너지를 저장하는 장치다.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는 리튬이온전지보다 가격이 저렴해 경제적이고, 자연 그대로의 해수를 사용해 친환경성도 잡은 차세대 에너지 저장 시스템(ESS, Energy Storage System)이다. 바닷물 속 소듐이온(Na⁺)과 물의 전기화학 반응을 이용하기 때문에 바닷물이 마르지 않는 한 무한정 이용할 수 있다. 이 또한 희소금속인 리튬보다 유리한 부분이다.
해수전지를 활용한 ESS가 활성화되면 가정 및 산업용 전기는 물론 원자력발전소의 비상 전원이나 선박 등 해양 시설물의 예비 전력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이에 김영식 교수는 2015년 세계 최초로 해수전지 개발에 성공한 후 곧바로 벤처기업 ㈜포투원을 설립했다.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기술임에도 시제품을 만들어보겠다고 나서는 기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묻혀서는 안 될 기술이라는 생각에 김 교수는 직접 창업에 나서코인형 · 각형 · 파우치형 해수전지를 개발했다. 이와 함께 관련 업체에서 해수전지를 시험하며 연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키트 제품도 만들었다.
이들 제품은 지난해 UNIST에 개관한 ‘해수자원화 전력시스템 전시관’에서 직접 살펴볼 수 있다. 이미 각종 연구소, 한국전력, 동서발전 및 국내외 수많은 관계자들이 이곳에서 해수전지의 상용화 가능성을 확인했다. 올해는 양극, 음극, 전해질 등 핵심 소재 개발에 집중하고 10㎾급 해수전지 ESS 실증실험도 진행할 예정이다. 더불어 2020년부터 가정용 해수전지를, 2022년부터 산업용 해수전지를 상용화한다는 로드맵을 가지고 있다.
해수전지는 국내 4조 원, 해외 47조 원 규모의 시장을 창출해 국내외 에너지 신산업을 활성화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이 시장을 김영식 교수가 선두에서 진두지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가는 건 쉽지만 새로 길을 내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국내 대기업은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에 최적화돼 있어 신시장을 개척하기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대학이 새로운 사업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역할도 담당해야 합니다. UNIST의 수출형 연구 브랜드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선도적으로 수행할 것입니다.”
잘 키운 연구브랜드, 2040년 재정 자립 씨앗 된다
‘수출형 연구브랜드 사업’은 UNIST가 새롭게 도약하기 위해 제시한 실행 전략이다. UNIST는 세계 10위권 연구 중심 대학으로 성장, 100억 달러 발전기금 조성이라는 중장기비전을 가지고 있다. 수출형 연구브랜드 사업은 연구역량의 확보와 발전기금 조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인 셈이다. 아울러 이를 통해 ‘인류의 삶에 공헌하는 세계적 과학기술 선도 대학’이라는 비전을 실현해나갈 방침이다. 우리 사회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올 파급력 있는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이를 상용화해 수출 가능한 산업으로 성장시켜 재정 자립화는 물론 국비와 시비로 진행된 R&D의 성과를 함께 나누겠다는 것이다.
* UNIST 재정자립화 실현 방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