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부터 1992년까지 방영된 미국 드라마 <맥가이버>는 기존 스파이물과는 달리 주인공 맥가이버가 물리와 화학 지식을 응용해 위기를 극복하는 장면이 많이 나왔다. UNIST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김진영 교수는 “제가 중학생일 때 <맥가이버>라는 미국 드라마가 인기였다”며 “그걸 보고 따라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처럼 어린 시절 이 드라마를 보고 과학자 또는 발명가를 꿈꾼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적지 않았다.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던 부산 토박이 김진영은 1992년 부산대 물리학과에 들어갔다. 손재주가 있어서인지 실험은 곧잘 했고, 특허나 발명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다른 많은 한국 청년처럼 학업 중간에 군대를 다녀오고, 지금의 아내와 사귀며 결혼을 꿈꾸게 되자 ‘졸업 후 취직’이라는 평범한 인생 계획을 세웠다. ‘맥가이버’는 어릴 적 꿈으로 기억 속에 간직하면서.
IMF 외환위기가 전환점
“그런데 1997년 11월 ‘IMF 외환위기’가 터진 겁니다. 이미 취직이 확정됐던 선배들도 무더기로 입사가 취소됐고, 한마디로 대혼란이었죠.”
당시 기업의 과잉투자와 정부의 금융정책 부재, 외국 투기세력의 공격으로 우리나라는 초유의 국가부도 사태를 맞아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를 받아들이는 치욕적인 선택을 해야 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고, 청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이 되지 않아 방황했다.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이한 김진영은 고민 끝에 일단 시간을 벌기로 했다. 즉 대학원에 진학해 2년을 보내면 그 사이 상황이 좀 나아질지 모르고 석사학위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뜻이 맞는 친구들과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열심히 공부했다. 1998년 여름 코스모스 졸업과 동시에 대학원에 들어갔고, 전년도에 부임한 이광희 교수를 지도교수로 택했다.
“신임교수가 부임하면 학생들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하는데, 이 교수님의 주제는 ‘전기가 흐르는 플라스틱’이었습니다. 플라스틱은 부도체라고만 알고 있었던 제게는 충격적인 얘기였죠.”
이때 강의가 인상에 깊이 남아 이 교수의 실험실에 들어갔지만, 알고 보니 고생길을 자초한 것이었다. 아직 1년이 채 안 돼 실험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결국 김진영은 동료 대학원생 몇 명과 석사 기간 내내 실험실 세팅을 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이 교수의 믿음과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사과정에 막 들어와 고분자(플라스틱)로 만든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연구를 열심히 하고 있던 김진영은 2000년 10월 노벨화학상 수상자 발표를 듣고 깜짝 놀랐다. 이광희 교수의 지도교수였던 미국 산타바바라 캘리포니아대 앨런 히거 교수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거 교수는 1977년 전기전도성이 큰 플라스틱을 만든 공로를 인정받았다. 고분자 OLED도 여기에서 파생된 분야다.
2004년 이 교수는 안식년을 맞아 1년 동안 히거 교수 연구실에 머물렀고, 이듬해 졸업한 김진영 박사도 산타바바라로 날아갔다. 그리고 노벨상 수상자의 실험실에서 2년 반가량 머무르며 놀라운 연구를 진행했다.
노벨상 수상자와 함께 연구
“히거 교수는 유기태양전지 분야를 개척한 분이기도 합니다. 1992년 나노물질인 풀러렌(C60)을 쓰면 유기태양전지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 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해 주목을 받았죠.”
유기태양전지는 고분자와 같은 유기분자를 소재로 써서 빛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시스템이다. 즉 유기분자가 빛을 흡수해 전자와 정공이 분리되면 전자는 음극으로 이동하고 정공은 양극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이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전자와 정공 대부분이 다시 합쳐지는 게 문제였다. 그런데 풀러렌을 넣어주자 분리된 전자를 얼른 채어가 음극으로 보내 정공과 다시 합쳐지는 비율이 줄면서 전력생산효율(광전변환효율)이 ‘1%’ 수준으로 올라갔다.
그럼에도 당시 실리콘 결정으로 만드는 실리콘(무기)태양전지의 효율이 20% 정도였기 때문에 비교가 안 됐다. 따라서 이 정도로는 상용화까지 갈 길이 멀었다. 그 뒤 참신한 소재가 더 이상 나오지 않으면서 유기태양전지 분야는 10여 년 동안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이에 히거 교수는 김 박사에게 기존의 소자구조를 뛰어넘는 뭔가 획기적인 연구를 해보라고 주문했다.
“마침 히거 교수 제자가 만든 회사에서 PCPDTBT라는 신물질을 만들어 갖고 왔더군요. 이를 이용해 적층형 유기태양전지를 만들었더니 효율이 6%대로 크게 올라갔습니다. 아울러 전지 전부를 용액에서 만드는 방법까지 개발했습니다.”
이 연구결과를 담은 논문이 2007년 <사이언스>에 실리며 관련 학계에서 화제가 됐고, 히거 교수는 김 박사에게 ‘마법의 손(magic hand)’를 가졌다고 칭찬하며 “있고 싶을 때까지 있어 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불과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서 빨리 결혼하는 게 꿈이었던 청년이 노벨상까지 탄 거물 과학자와 이런 대화를 나눌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나 이광희 교수가 광주과학기술원(GIST)로 옮기면서 ‘도움’을 청했고, 김 박사는 이번에도 기꺼이 응해 2007년 여름에 귀국했다. 그러다 이 교수의 연구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2008년 UNIST에 자리를 잡아 교수가 됐다. 이듬해 개교할 신생 대학이라 캠퍼스는 허허벌판이었지만 새로 실험실을 꾸민 경험이 워낙 많다 보니 걱정은 없었다. 이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연구를 하게 된 김진영 교수는 박사과정까지 6년을 함께한 고분자 LED 대신 히거 교수팀에서 연구를 시작한 고분자 태양전지를 더 깊이 연구하기로 했다.
“2000년대 들어 지구온난화가 화두가 됐습니다. 태양전지를 연구해서 전기를 만들 때 들어가는 화석연료를 줄이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었습니다.”
UNIST의 비전인 ‘인류의 삶에 공헌하는 세계적 과학기술 선도 대학’에서 ‘인류의 삶에 공헌하는’이라는 문구를 제안한 사람이 바로 김 교수다.
상용화의 관건은 유기분자 수명
지난 10년 동안 김 교수는 유기태양전지 분야에서 많은 성과를 거뒀다. 특히 지난해에는 부산대 진성호 교수팀과 공동 연구로 효율을 11.4%까지 끌어올렸다. 현재 20%가 훌쩍 넘는 실리콘태양전지에 비하면 여전히 절반 수준이지만 제조 비용이 훨씬 싸기 때문에 상용화하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기태양전지 제품은 나와 있지 않다.
“문제는 안정성입니다. 실리콘 결정은 경직된 구조라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제품만 만들 수 있지만 대신 수명이 수십 년에 이를 정도로 무척 안정적입니다. 반면 고분자로 만든 유기태양전지는 산화 스트레스에 상당히 취약해 특별한 봉지 기술이 적용되더라도 수명이 1년을 넘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김 교수는 기업체들과 공동 연구도 하고 자문도 하는데 어느 날 “효율은 더 이상 올리지 않아도 되니 수명이 5년만 되는 유기태양전지를 만들어주면 당장 상용화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에 김 교수도 최근에는 좀 더 안정적인 소재와 소자구조를 찾는 연구에 더 힘을 쏟고 있다.
한편 박사과정 때 연구한 LED를 태양전지에 접목하는 아이디어를 구현한 연구도 주목을 받았다. 즉 빛을 전기로 바꾸는 태양전지와 전기를 빛으로 바꾸는 LED를 결합한 ‘발광전지’를 만들어 지난해 학술지 <에너지 및 환경과학>에 발표했다. 김 교수는 2010년대 들어 새로운 태양전지 소재로 주목받고 있는 페로브스카이트(Perovskite)를 써서 만든 발광전지에 ‘페롭트로닉 소자(Peroptronic)’라는 이름을 붙였다. 웨어러블 기기 같은 제품에 전원(태양전지) 겸 디스플레이(LED)로 페롭트로닉 소자를 쓰면 ‘충전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다만 페로브스카이트 역시 안정성(수명) 문제로 아직 상용화가 안 되고 있다.
현재 김 교수의 실험실에는 박사 후 연구원 2명과 대학원생 15명이 유기태양전지를 비롯해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실험실 이름이 ‘NGEL’로 발음해보면 천사(Angel)와 비슷하다! 사실 NGEL은 차세대에너지실험실(Next Generation Energy Lab.)의 머리글자이지만, 김 교수는 자신의 연구가 사람들에게 천사처럼 기쁨을 가져다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유기태양전지는 싸고 쉽게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반투명하고 색깔도 마음대로 넣을 수 있습니다. 비록 효율은 실리콘태양전지에 비해 떨어지지만 대신 적용 범위가 훨씬 넓죠. 제 연구실의 창이 유기태양전지 필름으로 코팅될 그날을 꿈꾸며 열심히 연구해야겠죠.”
글_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는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며 <강석기의 과학카페>,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를 저술했으며, 옮긴 책으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