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의 순간에 인간의 영혼과 마음이 그들의 눈에, 손에, 태도에 나타난다. 이 순간이 기록의 순간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인물사진의 거장 유서프 카쉬(Yousuf Karsh)는 사진 찍는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에 따르면 인물을 찍는다는 건 단순히 외양을 멋지게 표현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눈과 손, 태도에 담긴 마음을 읽고 표현해내는 작업이다. UNIST에도 ‘당신’을 읽는, 읽고자 노력하는 마법사들이 있다.
풍경보다는 인물을 찍는 데 관심이 많은 UNIST 학생들이 있었다. 인물들의 표정과 태도에서 드러나는 생동감이 좋았던 그들은 2013년 소모임을 만들었다. 인물에 방점이 찍힌 만큼 좀 더 체계적인 구성이 필요했다. 사진작가, 스타일리스트, 모델로 분야를 나눠 학생들을 불러 모았다. 사진을 찍는 게 좋은 친구, 사진에 찍히는 게 좋거나 카메라 앞에서 자신감을 갖고 싶은 친구, 스타일링과 메이크업에 관심 있는 친구들이 한데 모였다. 사진 동아리 ‘스튜디오 인감(인물 감성의 약자, 이하 인감)’의 시작이었다.
“제가 합류할 때만 해도 동아리방이 없어서 학생회관 4층 창고 한구석을 빌려 장비를 보관하곤 했어요. 촬영할 일이 생기면 강의실을 빌려 진행했고요. 넉넉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다들 사진이 좋아서 모인 사람들이니까 열성적이었어요.”
2014년 2기 모델부에 합류한 김태윤(디자인 및 인간공학부 14) 학생은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그래서인지 2015년 동아리방이 생겼을 때 더없이 기뻤다고. 인감은 색지와 조명 등을 설치해 동아리방을 스튜디오로 만들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촬영을 진행했다.
손민지(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17) 회장은 “학교 공식 동아리가 되면 동아리방 활용 등에 다소 제약이 따라 현재는 비공식 동아리로 활동하고 있다”며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지금 이대로가 좋다”며 웃는다.
인감의 촬영 경험이 쌓이며 전문성을 갖추게 됐고, 학생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다. 특히 학교 밖으로 사진 찍으러 나가기 쉽지 않은 학생들에게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하윤구(기계항공 및 원자력공학부 17) 작가부 차장은 “학교나 학생들은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나와서 좋고, 인감은 사진으로 재능을 기부할 수 있으니 더없이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관심과 칭찬을 먹고 자라요
인감은 증명사진이 필요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매주 수요일 저녁 7~9시에 촬영을 진행한다. 또 한 학기에 두 번, 단체 사진을 신청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단체 위탁촬영을 한다. 학교의 의뢰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나 각종 축제 및 행사 촬영도 맡고 있으며, 2015년부터 진행한 울산행복학교 졸업 앨범 제작과 같은 재능 기부도 꾸준히 실시하고 있다.
이들이 학교에서 진행하는 대외 활동 중 가장 이색적인 활동으로 손꼽히는 ‘렛미인감’은 학생들의 스타일 변화를 돕는 이벤트다. 몇 년 전 유행했던 케이블TV 프로그램 ‘렛미인’에서 이름을 따온 렛미인감은 UNIST 학생들의 메이크업과 헤어 및 스타일링에 대해 조언하고 돕는 활동이다. 한 학기에 두 번, 중간고사 전후로 진행하고 있는데 매번 누구를 뽑아야 할지 난감할 정도로 지원자가 폭주한다. 오영권(디자인 및 인간공학부 17) 스타일리스트부 차장은 “렛미인감의 기본 지향점은 대학생에게 어울리는 코디”라고 말한다.
“실제 대학 생활을 하면서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메이크업과 스타일링 방법 등을 알려주고 사진도 촬영합니다. 가끔은 아방가르드한 스타일을 원하는 학생도 있죠. 무척 재미있는 작업이에요.”
인감의 모든 활동은 재능 기부로 이뤄져 무료로 진행된다. 하윤구 작가부 차장은 “주변에서 좋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가 잘하고 있구나’ 하는 확신이 생긴다”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에너지를 받는다”고 전했다.
자유로운 활동으로 더 많이 배우고 성장
매년 30여 명의 신입회원을 선발하는 인감의 회원은 현재 5기까지 15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의 열정 덕분일까. 인감은 각종 촬영 의뢰가 쏟아질 만큼 인지도와 실력을 두루 갖춘 동아리로 성장했다. 그만큼 체계적인 내부교육과 훈련도 필요할 터. 인감은 각 부서별로 매주 스터디를 진행하고 있다.
작가부는 카메라와 사진 구도, 피사체를 대하는 법, 편집 프로그램 등 촬영에 대한 전반을 배운다. 모델부는 사진 촬영에 필요한 자세 등을, 스타일리스트부는 다양한 스타일링에 대해 공부한다. 선배가 멘토가 되어 전수하지만 서로 의견을 공유하며 배우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자발적으로 만들어서 활동하는 모임인 만큼 사진 촬영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유롭게 이뤄진다. 일 년에 두 번 정기 출사를 비롯해 단체 채팅방에서 갑작스럽게 ‘비정기 출사’가 이루어지는 일이 흔하다. 내부 활동 중 하나인 콘테스트는 팀원들이 특정 주제에 맞춰 사진을 촬영하고 그중 최고의 사진을 뽑는 이벤트다. 작가만이 아니라 모델, 스타일리스트가 모두 기획에 참여해 자유롭게 경쟁하는 것이 특징이다. 대외 활동과 달리 머릿속 생각을 자유롭게 사진에 담아낼 수 있어 부원들에게는 자신의 끼를 발산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감의 진짜 힘은 다른 데 있다. 자생적으로 태어나 줄기와 꽃을 피운 다양한 활동조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손민지 회장은 “기발하고 발칙한 B급 사진을 주로 찍는 ‘생활 출사’, 릴레이로 사진 촬영을 진행하는 ‘릴레이 포토’, 동아리 취지에 맞지 않게(?) 음식 사진을 찍는 ‘음식 사진’ 등 다양한 갈래의 활동이 무척 활발하다”며 그것이 인감의 숨은 힘이라고 강조한다.
회장은 물론 각 부서 차장들은 이런 활동에 어떤 관여도 하지 않는다. 자신들도 모르는 활동조직이 수십 개는 더 있을 거라는 하윤구 작가부 차장의 말에서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배우며 성장하는 인감에 대한 자부심이 느
껴진다.
마음을 읽는 사진, 당신을 읽는 사진
연구자를 꿈꾸는 이가 대다수인 학생들인 만큼 결국 그들에게 인감 활동은 취미다. 하지만 취미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하고 고민하는 만큼 더 즐길 수 있는 법. 출사와 각종 프로젝트 활동, 대외 활동 등은 모두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사람들을 이해하고 배우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 인감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진에 온 열정을 바치고 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제 젊은 시절을 담을 수 있어 좋아요.”(김태윤)
“저만의 생각, 저만의 시선으로 찍은 사진들을 많은 이와 나눌 수 있어 행복해요.”(하윤구)
“메이크업에 관심만 있고 실천하지는 못했는데, 이제는 아침에 일어나면 메이크업하는 게 일상이 됐어요. 인감이 아니었다면 전 아직도 생각만 하고 있었을 거예요.”(오영권)
“사진을 찍을 때 피사체가 된 사람들의 생생한 표정이 너무 매력적이에요. 그 매력 덕분에 사진이 더 좋아졌고, 인감을 더 사랑하게 됐어요.”(손민지)
누군가에게 인감은 청춘의 기록이고 생각의 공유이며 자신감의 원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모난 사진 속 피사체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일이다.
유서프 카쉬는 “모든 인간의 비밀은 숨겨져 있다. 사진작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감은 사진을 통해 세상 곳곳의 이야기와 만난다.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진과 스타일링 등을 통해 세계 그리고 사람의 마음과 만난다. 그들의 눈과 손, 표정, 몸짓에 담긴 영혼과 마음을 읽어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당신의 마음을 읽는 마법사가 되길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