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에서 그러더군요. 때늦게 바람났다고… 허허.”
권혁무 생명과학부 교수는 요즘 아침에 일어나면 마음이 설렌다. 그를 사로잡은 건 21년째 알고 지내는 사이인 ‘TonEBP’라는 단백질이다. 사람도 아니고 단백질에, 그것도 새로 밝힌 것도 아닌데 어떻게 된 사연일까.
“1997년 이 단백질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이 정도로 중요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최근 수년 동안 연구한 결과 우리 몸의 건강과 질병에 광범위하게 관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죠.”
2011년 30년에서 1년 못 채운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해 UNIST에 자리잡은 뒤 권 교수는 한동안 연구 성과가 뜸한 것 같았지만, 이는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로 밝혀졌다.
올해 들어 학술지 <미국신장학회지> 2월호에 TonEBP가 당뇨병성 신증을 일으키는 데 핵심고리임을 밝힌 논문을 시작으로 학술지 <Gut(장)> 온라인판에 TonEBP가 간암 발생 및 재발을 촉진한다는 사실을 규명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 밖에도 이 단백질이 비만이나 자가면역질환 등 다양한 질환에 관여함을 입증한 논문들을 준비하고 있다. 한 단백질이 이렇게 넓은 스펙트럼을 보이니 권 교수가 바람이 날 만하다. 이순(耳順)이 넘은 나이에 과학자로 전성기를 맞은 그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저 친구, 왜 동물학과를 지망했지?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외울 게 많은’ 생물을 싫어했던 그는 고3 때 생물의 재미에 눈떴다. 수학과 물리를 좋아했고 경시대회에서 상을 탈 정도로 잘했지만 1년 사이 마음이 바뀌어 1976년 서울대 자연대 생약 계열에 입학했다. 2학년이 되면서 학과를 선택할 때 그는 ‘동물학과’를 지망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당시에는 미생물학과의 인기가 높았던 반면, 왠지 고루해 보이는 동물학과나 식물학과는 1지망으로 선택하는 학생이 드물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단순한 미생물보다는 복잡한 동물을 배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쨌든 사람도 동물 아닌가.
“당시 저를 포함해 ‘세 사람이나’ 동물학과를 지망해 교수들도 놀랐다고 하더군요. 둘은 성균관대 이석희 교수와 미국 소크연구소의 최승현 교수입니다.”
그는 훗날 서울대 총장이 된 조완규 교수의 발생생물학 실험실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학부 때 부모님 두 분이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고 힘든 시절을 보냈는데, 하루는 교수가 부르더니 미국 풀브라이트장학금에 지원해보라며 유학을 권유했다. 다행히 장학생에 선발됐고, 평소 생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82년 뉴욕주립대 의대의 신장생리학자인 홍석기 교수의 실험실에 들어갔다.
당시 홍 교수는 신장생리를 분자 수준에서 규명하고자 했고, 포유류에 비해 구조가 단순한 양서류를 대상으로 정했다. 권혁무는 도룡룡의 PAH수송체를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7년 학위를 받자 홍 교수는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며 미 국립보건원(NIH)의 저명한 신장생리학자인 모리스 버그 박사에게 그를 추천했다.
당시 버그 박사의 실험실은 신장 연구의 메카로, 대학교수가 되기 전 2~3년 머무르는 전도유망한 박사들이 즐비했다. 버그 박사는 막 떠오르던 분자생물학을 신장생리학에 접목하고 싶어 했고, 이런 시도를 흥미로워한 권 박사에게 이 일을 맡겼다.
권 교수는 이노시톨, 베타인, 타우린의 수송체를 클로닝(유전자 규명)하는 연구에 뛰어들었고, 1991년 존스홉킨스 의대 신장내과의 교수가 된 뒤 결실을 봐 1992년까지 세 수송체를 모두 클로닝하는 데 성공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 수송체들은 고장액, 즉 용질의 농도가 높은 환경에서 많이 발현돼 세포 내부로 이런 물질들을 끌어들여 세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1997년 권 교수는 특정 전사인자가 고장성(hypertonicity)을 감지해 각종 수송체 유전자의 전사를 촉진한다는 사실을 밝혔고, 이를 ‘고장성반응인핸서결합단백질(TonEBP)’이라고 불렀다. 권 교수는 1999년 마침내 TonEBP를 클로닝하는 데 성공했다.
과학자와 임상의학자가 만나면
2000년 인간 게놈 초안이 발표되면서 생명과학계가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게놈을 파헤치면 암을 비롯한 각종 질병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수십억 달러의 연구비가 투입됐고, 사람 사이의 게놈 차이가 특정 질병에 걸릴 위험성을 예측하고 최적의 치료제를 찾는 열쇠가 되는 ‘개인 게놈 시대’의 도래가 임박해 보였다. 20년 가까이 지난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당시 장밋빛 꿈 대부분은 아직 현실이 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의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2002년 매릴랜드 의대로 옮긴 권 교수는 신장내과 연구 총괄 담당 교수로 일하던 2007년 이런 흐름을 반영해 생명정보학 전문가인 아파신 파사 교수를 학과에 영입했다. 이때만 해도 파사 교수가 그의 연구 행로를 바꿔놓을 줄 꿈에도 몰랐다. 어느 날 파사 교수가 오더니 “도대체 TonEBP가 뭐냐? 이런 유전자는 처음 봤다”며 데이터를 내밀었다. 만성신장질환 관련 유전자 변이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여기저기에서 TonEBP 유전자의 변이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파사 교수가 돌아간 뒤 고장성 환경에 대응하는 수송체 유전자의 발현을 촉진하는 게 TonEBP 기능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 권 교수는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TonEBP가 인체의 건강과 질병에 미치는 영향을 밝히는 장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UNIST로 옮기면서 더욱 집중했다.
“새로운 연구 인력으로 완전히 새로 연구했습니다. 최근 논문들은 저자 대다수가 UNIST 소속이죠.”
권 교수의 말에서 자부심이 느껴졌지만 사실 어려움도 많았다. TonEBP와 질병의 관계를 밝히려면 환자의 데이터가 필요한데, 서울의 병원에서조차 적당한 데이터를 구하기 힘들었다. 지난 2월 <미국신장학회지>에 실린 TonEBP와 당뇨병성 신증의 관계를 밝힌 연구가 미국인의 데이터를 갖고 진행된 이유다. 다행히 최근 울산대병원의 임상연구자들과 공동 연구를 하기로 함에 따라 한국인에 대해서도 TonEBP 유전자 변이와 당뇨병성 신증의 관계가 조만간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40여 년간 이어진 도전의 삶
이 논문을 잠깐 소개하면, TonEBP는 고장성 환경에서 세포를 보호할 뿐 아니라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감염에도 대응해 염증 반응을 일으켜 침입한 병원체를 무찌른다. 즉 선천 면역계의 하나인 대식세포에서 TonEBP 유전자 발현이 높아지면 대식세포가 신장으로 침투해 신장염증을 유발한다.
그런데 당뇨가 있어 고혈당이 지속돼도 대식세포에서 TonEBP 유전자 발현이 증가해 염증 반응으로 이어졌다. 원래 염증은 병원체를 퇴치하는 효과적인 전략이지만 당뇨 환자의 고혈당처럼 자극이 지속될 경우 만성염증이 돼 결국은 신장을 망가뜨리게 된다. 권 교수는 “대식세포가 당을 바이러스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고 추측했다.
지난 2월 학술지 <Gut> 온라인판에 실린 TonEBP와 간암의 관련성에 관한 논문의 경우, 우리나라 환자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분석한 결과라 더 의미가 크다. 권 교수팀은 울산대병원에서 제공한 환자 296명의 간 시료(수술로 떼어낸)를 분석했고, 그 결과 간암 환자의 92.6%에서 암세포가 주변 세포에 비해 TonEBP를 더 많이 발현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암 조직이나 주변 조직의 TonEBP 발현 수치가 추후 간암의 재발과 전이, 사망률을 예측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TonEBP의 활동을 억제하는 약물이 항암제로 쓰일 가능성을 검토할 예정이다.
만성염증은 신증이나 암뿐 아니라 ‘만병의 근원’이고 따라서 TonEBP가 개입된 만성염증이 유발한 질환도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실제 지금까지 조사한 결과, 류마티스성 관절염이나 루프스 같은 자가면역질환과 뇌염증이나 아밀로이드 생성으로 유발된 신경세포 손상에도 TonEBP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또 칼로리 과잉 섭취 시 TonEBP 발현이 극적으로 높아지면서 지질 분해와 열 생성이 억제돼 결국 비만으로 이어진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이 정도면 TonEBP가 건강과 질병의 핵심고리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작은(답이 어느 정도 나온) 문제에 매달리지 말고 큰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쳐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현대인을 괴롭히는 암이나 심혈관질환, 자가면역질환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는 일 같은 거죠.”
큰 문제에 도전하다 보면 물론 실패할 위험성도 크다. 하지만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큰 판에서 놀아보는 것도 멋진 일이 아니냐는 말이다. 지난 40여년 동안 마치 남들이 가지 않은 길만 골라서 가듯 도전적인 삶을 살아온 권 교수이기에 이 말이 더욱 묵직하게 다가왔다.
글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는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며『강석기의 과학카페』,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를 저술했으며, 옮긴 책으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