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도중에 낙오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진짜 좋아한다면 한번 도전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UNIST 자연과학부 최은미 교수는 우리나라는 물론 서구에서도 흔치 않은 과학자다. 가전제품 수리점이 연상되는 각종 장비와 부품이 널려 있는 테라헤르츠파 & 전자동역학 연구실을 이끌고 있는 여성 실험물리학자이기 때문이다.
2017년 최은미 교수팀은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방사능 물질 원거리 실시간 탐지 기술을 개발했다는 연구 결과를 실어 주목받았다. 이 기술은 2018년 ‘국가 연구개발 우수 성과 100선’에 뽑힌 데 이어 ‘국가 연구개발 최우수 성과 12선’에 올랐다. 여성에 대한 편견이 여전한 사회에서 최 교수는 어떻게 이를 극복하고 이처럼 뛰어난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
학부제 덕분에 물리학자의 길로
최근 과학 분야에 여성의 진출이 크게 늘었다지만 물리학 분야는 여전히 소수다. 물리학을 좋아하는 여학생 가운데 다수가 ‘여성은 수학과 물리학을 잘하기 어렵다’는 오래된 편견의 영향을 받아 다른 진로를 택하기 때문이다. 다만 수학과는 학부만 졸업해도 진로가 다양하다는 인식 때문인지 여성 비율이 꽤 높다.
중고교 시절 수학을 좋아했던 최은미도 특별한 일이 없었다면 아마 수학과를 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가 입학한 1996년 이화여대에서 처음 학부제를 실시했다. 학과별로 신입생을 뽑다가 그해부터 2학년에 올라가면서 학과를 선택하는 학부 단위로 뽑은 것이다. 자연과학대에 들어간 최은미는 1년 뒤 수학과를 택할 생각이었지만 필수 교양과목인 ‘일반 물리학’ 수업을 들으며 완전히 마음이 바뀌었다. 그가 좋아하는 건 순수 수학이 아니라 수리물리학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예상대로 학부생 가운데 물리학과를 택한 사람은 열두세 명에 불과했다. 반면 수학과 통계학을 택한 여학생은 100명 가까이 됐다.
전공 수업은 늘 소규모로 이뤄졌지만 최은미는 미래의 진로는 신경 쓰지 않고 물리학의 재미를 마음껏 즐겼다. 3학년이 돼서는 ‘연구 참여 랩(lab)’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방학 때 다른 대학의 실험실에서 보내는 경험도 했다. 그리고 이 시간이 그의 삶을 결정지었다.
“당시 포항공대의 남궁원 교수님 실험실에 가게 됐습니다. 우리나라 핵융합연구를 개척한 분이죠.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이때 깊은 인상을 받은 최은미는 졸업 뒤 포항공대 남궁원 교수 실험실에서 석사과정을 하기로 했다.
“스케일이 큰 연구를 하고 싶었습니다. 핵융합이야말로 그런 주제라고 생각했죠.”
실험물리학자에서 UNIST 교수로
그러나 당시는 아직 시뮬레이션 단계라 컴퓨터를 이용한 계산 연구에 만족해야 했다. 설사 실험을 하더라도 거대 장치 전반을 연구하기는 어렵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때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의 명문 MIT에서 플라즈마를 만드는 고출력 마이크로파 발생 장비를 만드는 연구로 박사 학위 진학을 하게 된 것이다. 플라즈마는 원자를 이루는 원자핵과 전자가 해리된 고에너지 상태다. 핵융합반응을 하려면 먼저 플라즈마를 만들어야 하므로 이런 장비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물리학뿐 아니라 전자공학, 원자핵공학 등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이 모여 있더군요. 장비를 만들면서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학부 때부터의 꿈인 실험물리학자로서의 삶에 푹 빠져 있던 최은미는 한 강의를 같이 듣던 한국 유학생과 친해졌고 결국 결혼에 골인했다. UNIST 생명과학부 조형준 교수다. 그의 박사과정은 인생에서 가장 다채로운 시절이었던 셈이다.
졸업 후 석유탐사회사인 슐룸베르거에 취직해 탐사 도구를 개발하는 업무를 맡았다. 연봉도 높고 대우도 좋아 미국에 정착할까 생각하던 때 은사인 남궁원 교수에게서 “한국에 UNIST라는 대학이 새로 생겼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바꿨다.
“2010년 캠퍼스에 와서 무슨 연구를 할까 고민하다 테라헤르츠(THz) 고출력 발진 및 증폭 장치를 개발하기로 했습니다. 통신에 대용량이 요구되다 보니 운반 주파수를 높여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이론을 실험으로 검증하는 건 나의 몫
어느 날 최 교수는 우연히 이 장치로 원거리 방사능 탐지가 가능하다는 내용의 논문을 보게 됐다. 미국 메릴랜드대 연구자들이 2010년 발표한 이론 계산 논문이었다. 즉 주변에 방사능 물질이 있으면 테라헤르츠 전자기파를 쏘아줄 때 플라즈마가 형성되는 연쇄반응(Plasma Breakdown)이 일어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이다. 방사능 물질에서 나오는 고에너지 전자나 전자기파(감마선)로 유도되는 전자가 테라헤르츠파의 플라즈마 연쇄반응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방사능 물질에 대한 우려가 높았지만 먼 거리에서는 이를 검출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이 논문이 제시한 방법을 실제 구현한다면 방사능 물질 유출 위험을 낮추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논문이 나온 지 꽤 됐음에도 이를 실험으로 증명했다는 얘기는 없었다.
최 교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2012년 본격적인 실험에 착수했다. 하지만 최 교수의 실험실이 개발한 테라헤르츠파는 출력이 낮아서 대기압보다 낮은 압력 조건에서 공기 대신 아르곤을 써야 플라즈마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실험적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이 조건으로 실험을 했고 주변에 방사능 물질이 있을 때 확실히 반응이 더 빨리 일어남을 입증했다.
“학술지에 논문을 보냈는데 그쪽 기대치가 너무 높더군요. 원거리 탐지 장치가 의미가 있으려면 대기압 공기 중에서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죠.”
틀린 얘기는 아니었지만 이 장치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포기하려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건을 바꿔 실험을 진행했고 뜻밖에도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 실험 결과의 가치가 확 올라간 순간이었다. 이론적으로는 테라헤르츠파 출력이 열 배는 돼야 하는데, 훨씬 약한 출력에도 어떻게 연쇄반응이 일어날 수 있는지 아직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규명하는 것도 그에게 남겨진 과제다.
실험장치는 소형이라 최대 검출 거리가 1.2m에 불과하지만 장치를 좀 더 크게 만들고 출력을 높여 먼 거리에서도 테라헤르츠파가 모이게 할 수 있으면 최대 1km 밖에서도 방사능 물질을 검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핵융합에서 정보통신 분야까지 주목
이 밖에도 최 교수팀에서는 궤도각운동량을 지닌 전자기파의 특성도 연구하고 있다. 기존에 널리 쓰이는 전자기파는 선형편광, 즉 전기장 방향이 일정한 전자기파다. 반면 나선처럼 꼬인 빛으로 묘사되는 궤도각운동량을 지닌 빛은 자유도가 높아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어 차세대 통신 운반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가시광선처럼 파장이 짧은 전자기파는 광학 분야에서 많이 연구됐고, 라디오파처럼 파장이 긴 전자기파는 전기·전자공학 분야에서 많이 연구됐죠. 그런데 그 사이에 있는 테라헤르츠파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덜 돼 아직 밝혀야 할 게 많이 남아 있어요.”
거대한 핵융합장치를 만드는 모습을 꿈꾸며 뛰어든 연구 분야가 핵융합은 물론 정보통신 분야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는 현재 상황을 생각하면 최 교수는 자신이 행운아라는 생각도 든다. 게다가 이를 이용해 우리나라 사람들 대다수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방사능 물질 유출의 위험성을 낮출 수 있는 장치까지 만들고 있으니 더 뿌듯하다.
“아직 진로를 정하지 못했다면 학부 전공으로 물리학을 추천합니다. 물리학을 배우는 과정에서 논리적 사고력을 키울 수 있어 졸업 후 어딜 가서 무슨 일을 해도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갖출 수 있으니까요.”
요즘 걸 크러시(Girl Crush)라는 말이 유행인데, 물리학에 관심이 많지만 뛰어들 결심을 하지 못하고 있는 많은 여학생들에게 최 교수야말로 걸 크러시의 대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글_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는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며 <강석기의 과학카페>,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를 저술했으며, 옮긴 책으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