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정복하지 못한 질병이 있다. 바로 암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인류가 암이라는 공포에서 벗어날 날이 머지않았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연구해온 기술들과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뭉쳐지면서 더 효과적인 치료법이 나오기 때문이다. UNIST에서도 암을 쫓는 연구가 꾸준히 진행 중이다. 노련한 사냥꾼이 끈질기게 목표물을 쫓듯 어떤 난관에도 포기하지 않고 암 정복을 위한 다양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 UNIST 과학자들의 암 치료제 연구에 대해 살폈다.
비만과 암의 연결고리를 밝히다
박지영 생명과학부 교수 – 대사 스트레스 세포대응 연구센터
“비만이나 당뇨 환자들이 왜 항암제가 잘 듣지 않는지 궁금했어요. 이들에겐 암 재발도 빈번하고, 사망률도 높은데 그 이유도 찾고 싶었죠. 그래서 주로 비만이나 당뇨와 상관관계가 높은 유방암, 자궁내막암, 간암을 연구하고 있어요.”
현대인의 고질병으로 일컬어지는 ‘비만’이 암을 일으키거나 악화시킬 수 있는 위험인자로 대두되고 있다. 지방세포에서 나오는 잘못된 신호전달물질이나 사이토카인(Cytokine, 세포로부터 분비되는 단백질 면역조절제)들이 암의 성장이나 전이, 항암제 내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특히 2012년에 박지영 교수가 처음으로 발견한 ‘엔도트로핀(EndoTroPhin, ETP)’이 요주의 물질이다.
엔도트로핀은 세포외기질 단백질인 제6형 콜라겐에서 특이하게 잘려져 나온 신호전달물질이다. 이 물질은 비만이나 당뇨가 있는 지방세포에서 많이 발현되고, 지방조직 내 섬유화와 염증화를 증대시킨다. 이 물질의 구체적인 역할은 박 교수팀이 하나씩 찾아내는 중이다. 최근에는 비만과 상관관계가 매우 높은 간 조직에서 엔도트로핀의 역할을 밝혀 2018년 9월 23일 <병리학 저널(Journal of Pathology)> 온라인 판에 발표했다.
“비만에서 비알콜성 간염이나 간 섬유화가 시작되는데, 이게 지속되면 결국 간암으로 발전합니다. 특히 간 손상이 왔을 때 엔도트로핀의 발현이 높아지면, 간세포를 죽이는 신호전달물질로 작용해 염증과 섬유화 세포를 활성화시켜요.”
간 조직에서 엔도트로핀이 과발현되면 결국 간염, 간섬유화, 간경화, 간암의 단계를 밟는다. 만약 이 악순환의 과정을 거쳐 간경화까지 이르면 더 이상 손을 쓰기 어려운 상황이 된다. 불행히 간암으로 이어지면 80~90%에 이르는 간 조직을 제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마저도 재발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간염이나 간섬유화 단계에서 신속히 치료해 간암으로 번지지 않도록 막는 게 최선이다.
“지난 100년간 많은 연구자들이 암을 연구해왔지만 아직 정복하지 못했어요. 지금까지는 주로 암세포 자체만 연구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최근에는 암세포와 주변 세포들과의 상호작용이 중요하다는 걸 인식하고 관련 연구가 활발해졌습니다. 이번 연구 역시 암 주변 세포들을 동시에 제어하는 효과적인 치료 전략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박 교수는 또 비만이나 당뇨와 같은 대사성 질환 환자에게서 더 악화되는 암의 기전을 밝히고 있다. 그녀는 “비만이나 당뇨가 있는 암퐌자는 기존의 화학요법과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며 “어떠한 치료전략을 수립해야 하는지 고민해 환자에게 적합한 맞춤형 항암제를 개발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박 교수팀은 또 천연물에서 추출한 치료제 개발에도 주력하고 있는데, 10년 내 상용화를 목표로 전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박 교수의 연구는 현대 사회가 풀어야 할 난제 중의 난제인 비만과 암. 이 둘을 융합한 통합 연구이기에 더욱 귀추가 주목된다.
암세포의 에너지 대사를 역이용한 차세대 항암제
채영찬 생명과학부 교수 – 세포간 신호교신에 의한 암제어 연구센터
암처럼 빨리 자라는 세포는 더 많은 영양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법. 그래서 암세포는 정상세포와 다른 대사 경로를 갖는다. 암세포만 가지는 특이한 세포 대사 경로를 찾으면, 암세포를 ‘굶겨 죽이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방식의 치료제인 ‘4세대 대사항암제’가 주목받고 있다.
암세포와 싸우는 치료제인 항암제는 4세대까지 개발됐다. 1세대 화학항암제는 정상세포까지 공격해 부작용이 심하고, 2세대 표적항암제는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는 암의 특성상 내성이 생기기 쉬우며, 3세대 면역항암제는 20~30% 환자에게는 효능이 없다는 단점을 가진다. 4세대 대사항암제는 이들 단점을 개선할 차세대 항암제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채영찬 교수의 연구가 바로 암세포의 대사 활동을 차단하는 4세대 대사항암제에 대한 것이다.
“특히 저는 세포 내 에너지 대사의 핵심 세포소기관인 미토콘드리아의 작동 경로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암세포의 미토콘드리아 내 대사와 모양 변화, 세포 사멸 경로를 한꺼번에 조절하는 단백질을 발견했어요.”
채 교수팀이 발견한 단백질은 특히 치료가 어렵기로 유명한 거세저항성 전립선암에서 발현이 증가하는데, 암세포 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분석됐다. 따라서 이 단백질을 제어할 경우, 암세포만 특이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차세대 항암제를 개발할 수 있다. 현재 채 교수는 이 단백질을 조절할 수 있는 소분자를 발굴하는 측정 시스템(Assay System) 개발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이 연구에 성공하면 실제 치료약 개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암을 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암 역시 정상세포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니까요. 다만 잘 달래야 하는 ‘질 나쁜 가족’이죠. 정상세포에서 떨어져나온 만큼 잘못 하면 정상세포까지 다칠 수 있어 치료가 어렵습니다. 현재로서는 암세포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니 더 이상 자라거나 전이되지 못하도록 해 생명을 연장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대책입니다.”
최근 암세포가 가진 일반적인 특성에 초점을 맞춰 유전자 변이에 영향을 받지 않는 항암제의 가능성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채영찬 교수의 목표도 다양한 암종에 적용 가능한, 범용성을 가지면서 내성을 억제하고 기존 항암제와 병용할 수 있는 차세대 항암제를 개발하는 데 맞춰져 있다.
채영찬 교수는 “궁극적인 목표는 암의 본질적인 원리를 밝히는 것”이라며 “암세포 미토콘드리아 내 스트레스 조절과 세포대사 변화를 조절하는 근본 원인를 밝히고, 암 재발과 항암제 내성의 원인이 되는 암줄기세포의 에너지 대사도 연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스마트한 전략가’인 암보다 몇 배 더 스마트하게!
김은희 생명과학부 교수 – 세포간 신호교신에 의한 암제어 연구센터
“암은 항암제의 공격에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짜고, 주변 세포를 조정해서 자신의 생존에 유리한 환경을 만드는 스마트한 전략가입니다. 따라서 암의 아킬레스건을 찾아야 합니다.”
김은희 교수가 찾은 암의 아킬레스건은 무엇일까. 김 교수는 혈액암 그중에서도 골수이형성증후군 환자에게서 빈번히 발견되는 RNA 이어맞추기(Splicing)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의 유전 변이를 밝히는 데 연구를 집중하고 있다. 골수이형성증후군은 지속적으로 발암물질에 노출되거나 방사선 및 항암제 치료에 의해 위험성이 증가하는 골수 이상 질환으로, 치료가 어려운 노인성 질환이다. 이미 고령사회에 진입한 우리나라에서는 발병 빈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 질환 중 하나다. 그런데 골수이형성증후군에서 RNA 이어맞추기 유전자들의 유전 변이가 반복적으로 관찰돼 김은희 교수의 관심을 끌었다.
유전자의 발현 과정은 DNA에서 RNA의 전사, RNA에서 mRNA로의 편집, mRNA에서 단백질로의 번역으로 이뤄진다. 여기서 RNA 이어맞추기 유전자들은 mRNA로의 편집 과정을 조절한다. 만약 RNA 이어맞추기 유전자들에게 유전 변이가 일어나면 정상적인 RNA 편집 과정에 문제를 초래하고, 비정상적인 mRNA 생성으로 다른 형태의 단백질을 발현시키거나 특정 단백질의 발현을 감소시킨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변이가 질병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RNA 이어맞추기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의 유전 변이는 과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러한 유전자 변이는 유전자 두 카피(Copy) 중 한 카피에서만 일어나고, 이미 관련 유전자의 변이를 지닌 세포에서는 추가적인 RNA 이어맞추기 관련 유전자의 변이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를 토대로 RNA 이어맞추기 관련 유전 변이를 지닌 암세포는 정상세포에 비해 추가적인 RNA 이어맞추기를 무력화할 수 있는 공격에 쉽게 무너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러한 변이를 가지고 있는 암세포의 아킬레스건을 밝혀냈다고 할 수 있죠.”
이 연구는 2018년 8월 13일 세계적인 암 연구 학술지인 <암 세포(Cancer Cell)>에 발표됐다. 과거 연구자들은 암 세포의 성장을 촉진하는 특이 단백질 연구에만 집중했기에 RNA 이어맞추기 유전자들의 유전 변이를 이용한 암 치료 연구는 이제 막 태동했다고 볼 수 있다. 유전 변이는 골수이형성증후군 이외에도 만성림프구성 백혈병, 췌장암, 폐암, 유방암에서도 보고되고 있어 이러한 변이를 가진 다양한 암종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개념의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김은희 교수는 앞으로 생명과학부의 명경재, 김홍태 교수, 강남성모병원의 김유진 교수와 함께 국내 혈액암 환자의 샘플로 관련 연구를 이어갈 예정이다. 우리 몸에서 암세포는 주변의 정상세포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작용한다. 따라서 질병을 치료하는 의료진과 함께, 혈액암세포와 주변 세포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춰 연구하려는 계획이 주목받고 있다. 더불어 RNA 이어맞추기 유전 변이에 의해 잘못 만들어진 단백질은 무엇이며, 암세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자 기전을 밝히는 연구도 진행할 계획이다.
암에 대한 인류의 이해를 조금이라도 넓히는 데 작은 걸음을 보태고 싶다는 김은희 교수는 자신의 바람대로 암의 정체를 밝히는 데 한 걸음 다가서고 있다.
나노 전달체는 암세포만 표적하는 유도미사일
유자형 자연과학부 교수
항암제는 이미 많이 개발됐다. 문제는 항암제를 어떻게 암세포에만 전달할 것인가이다. 물론 약물 전달체도 오래 전부터 연구돼 왔지만 실제 시장에 나온 것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노 전달체는 나노 물질 안에 약물을 담아 암세포에 전달하는 것인데, 체내에 들어가면 몸속 단백질들이 달라붙는 단백질 코로나 현상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이를 외부물질로 인식한 우리 몸이 면역 체계를 가동합니다. 결국 암세포에 치료제를 전달해야 하는 나노 전달체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채 사멸되거나 어렵게 표적에 도착해도 효율이 낮아집니다.”
그렇다면 ‘미션 임파서블’을 ‘미션 파서블’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유자형 교수는 체내에서 나노 전달체의 단백질 코로나 현상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찾았다. 바로 나노 전달체 입자 표면을 단백질로 감싸 보호막을 입히는 것(PCSN). 그러면 다른 단백질이 달라붙지 않는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단백질 구조 그대로 감쪽같이 붙여야 단백질 코로나 현상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노 입자 위에 구조를 잘 유지한 단백질을 붙여 보호막을 만들면 면역 체계가 작동해 제거되지 않습니다. 암세포까지 그대로 도달할 수 있으니, 치료제의 효과를 높일 수 있죠.”
유 교수팀은 이렇게 ‘약물 전달체 플랫폼 기술과 물질’을 개발해 저명한 국제 학술지인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Nature Communications)> 2018년 11월 1일자 온라인 판에 게재했다. 이 연구는 새로운 표적 지향형 약물 전달 시스템의 원천 기술을 확보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하지만 유 교수는 나노 입자의 독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임무를 다한 나노 전달체가 체내에 남으면 나노 입자의 독성이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자형 교수는 나노 입자가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단백질에 약물을 실어 나르는 방법도 연구하고 있다.
“나노 입자의 독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보다 빨리 약물 전달체가 상용화될 수 있도록 단백질에 약물을 연결하는 방법을 병행 연구하고 있습니다.”
공동 연구자 중 한 명인 자연과학부 김채규 교수가 ‘퓨전바이오텍’이라는 벤처회사를 설립해 단백질에 약물을 연결하는 기술의 상용화를 추진하고 있는데, 5년 내 전임상시험을 마치고 글로벌 제약회사와 임상에 돌입하는 게 목표다. 하지만 나노 전달체를 활용해 질병을 치료하겠다는 또 다른 목표도 포기하지 않았다. 유자형 교수는 “나노 전달체는 치료제의 효과를 월등히 높일 수 있는 방법”이라며 “암뿐 아니라 다양한 질병의 진단과 치료, 열-광학 치료 등 다방면에 적용할 수 있어 만능 플랫폼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강조한다.
UNIST의 암 센터들
* 세포간 신호교신에 의한 암제어 연구센터 : 암세포 자체에 집중했던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암 연구를 진행한다. 암을 비롯한 주요 주변세포 사이에서 신호를 주고받는 원리를 밝혀내 ‘암 미세환경’의 작동 원리를 규명한다. 지금까지 제한적으로 다뤄졌던 암 미세환경에 대해 밝혀내면 새로운 암 진단 기술과 암 치료제 발굴의 기초가 될 전망이다. 강세병 생명과학부 교수가 센터장을 맡고 있으며 채영찬, 김은희, 고명곤, 권태준, 이세민, 조형준 교수가 참여하고있다. | 사진: 김경채
* 대사 스트레스 세포대응 연구센터 : 암과 당뇨병은 모두 대사 스트레스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질병이다. 이러한 대사 스트레스를 연구해 질병 치료의 기초를 다지는 연구를 수행한다. ‘세포 내 대응 연구’, ‘세포 간 대응 연구’, ‘기전시스템생물학 연구’를 중심으로 세포 대응의 원리를 파악하고 있다. 권혁무 생명과학부 교수가 센터장이며 박지영, 강병헌, 박찬영, 최장현, 박태은, 남덕우, 서정곤 교수가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