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UNIST가 개교할 때 원년 맴버로 합류한 양창덕 교수는 개교 10주년을 맞은 2019년 시무식에서 ‘올해의 교직원상 글로벌상’을 수상했다. 서른이 넘어 본격적인 연구 활동을 시작한 그의 연구 열정은 ‘늦바람이 무섭다’는 속설처럼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요즘은 해외여행이 일상이 됐고 외국에 나가도 스펙터클한 대자연이 아닌 이상 우리나라와 큰 차이가 없다. 특히 도시는 점점 비슷해져 외국에서 스타벅스를 만나면 반가울 정도다. 그러나 UNIST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양창덕 교수가 미국 구경을 했던 1997년만 해도 미국 같은 ‘선진국’은 우리나라와 꽤 차이가 났다. 그는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한 달 동안 미국을 방문한 경험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고 말한다.
“1997년만 해도 우리나라 대학에는 학과에 윈도95가 깔린 PC가 한두 대 있는 수준이었는데 미국의 대학 도서관에는 수십, 수백 대가 늘어서 있더군요. 건물들도 웅장하고 월마트 같은 어마어마한 마트도 있고….”
이전까지 유학을 꿈꿔 본 적 없는 대학생 양창덕은 문득 ‘이런 곳에서 한번 공부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학생들은 이런 말이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지난 20여 년 동안 우리나라가 그만큼 많이 변한 것이다.
서른하나에 독일로 유학 떠나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양창덕은 과학이나 공학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막연히 ‘공대를 가야겠다’고 결심, 충남대 섬유고분자공학과를 택했다.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했지만 사실 재미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고 장학금을 타기 위해서였다. 아무튼 학과에서 성적이 아주 좋았고 그 덕분에 1개월 동안 미국을 체험하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뽑혔다. 그해 겨울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가 터지며 나라가 휘청거렸지만 성적이 좋았던 양창덕은 이듬해 졸업을 앞두고 중견기업에 합격했다.
“그런데 막상 취직을 하려니 뭔가 아쉽더군요. 책으로만 공부했지 제 연구를 한 경험이 없었으니까요.”
결국 고민 끝에 취직 대신 대학원을 택했다. 석사과정 2년 동안 실질적인 실험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막 부임한 이택승 교수의 실험실에서 유기물을 이용한 화학 센서 관련 재료를 합성하는 연구였다. 뜻밖에도 실험이 적성에 맞았고 연구 결과도 좋아 학위를 마치고 대기업인 효성의 연구소에 취직했다.
“처음에는 무척 기뻤습니다. 그런데 회사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석사 연구원으로서 한계가 보이더군요. 그리고 수년 전 미국 경험이 떠오르면서 유학을 가야겠다는 강한 열망이 생겼습니다.”
회사를 다니며 유학 준비를 했지만 ‘이러다가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양창덕은 고심 끝에 입사 2년 만에 사표를 던졌다. 나이 서른에 백수가 된 것이다. 여자친구(현재 아내)가 적극 지지해 준 게 큰 힘이 됐다. 1년 동안 고생고생해서 토플 성적은 맞췄는데 이번엔 GRE(미국 대학원수학자격시험)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학 준비하다가 끝나겠다고 생각한 양창덕은 미국 대신 전통적인 화학 강국 독일로 눈을 돌렸고, 다행히 막스플랑크 고분자연구소 클라우스 뮬렌(Klaus Müllen) 교수 실험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뮬렌 교수님이 합성화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대학원 생활이 그렇게 힘들 줄도 몰랐고요.”
특히 실험실 미팅 시간에 교수가 가끔 연구와 관련한 기본 지식을 묻곤 했는데 대답하는 동안 진땀이 났다. 실험실에는 7, 8년이 지나도 학위를 받지 못하는 학생들이 여럿 있었고 심지어 중간에 쫓겨나기도 했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분자를 합성하는 연구를 맡은 양창덕은 ‘이곳을 빨리 떠나는 것(물론 학위를 받고)’이 목표가 됐다.
그런데 그 목표가 조기에 달성됐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교수가 부르더니 “창덕, 이제 졸업해도 되겠다”고 담담히 말하는 게 아닌가. 늦은 나이에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하는 외국인 제자가 기특했던 걸까. 2006년 졸업 후 양창덕 박사는 미국 산타바바라 캘리포니아대 프레드 우드 교수 실험실에서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유기 태양전지 소자를 합성하는 연구를 했다.
복잡한 것보다 단순한 것 추구
2009년부터는 UNIST 교수로 자리를 옮겨 유기 태양전지 소자에 꾸준히 매달렸다. 태양전지 하면 떠오르는 실리콘 태양전지에 비해 유기 태양전지는 가볍고 유연하고 생산비도 낮다. 이런 장점 덕분에 미래형 태양전지 후보로 꼽히며 전 세계에서 꾸준히 연구 중이다.
양창덕 교수팀은 지난 2018년에 특히 탁월한 연구 성과를 여럿 발표했다. 먼저 지난해 7월 저명한 학술지 <에너지 및 환경과학(EES)>에 풀러렌을 안 쓰는 유기 태양전지를 개발해 그 메커니즘을 규명한 연구 결과를 실었다.
유기 태양전지의 광활성층은 전자-주개와 전자-받개로 이뤄져 있다. 즉 햇빛(광자)을 받은 주개에서 전자가 튀어나와 받개를 거쳐 전극에 도달한다. 예전에는 전자-받개로 탄소공 분자인 풀러렌을 썼는데 최근 다른 분자로도 더 좋은 효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양 교수팀은 이런 물질을 합성해 상용화 기준인 10%를 넘어 12%라는 효율을 얻었을 뿐 아니라 그 메커니즘까지 규명했다. 즉 주개에서 받개로 전자가 이동할 뿐 아니라 받개에서 주개로 정공도 이동했기 때문이다.
10월에는 100번을 접었다 펴도 효율을 90%까지 유지하는 고유연성 유기 태양전지를 만들어 학술지 <앙게반테 케미(Angewandte Chemie)>에 발표했다. 연구자들은 광활성층에 실리콘(silicone/polysiloxane) 기반의 고분자를 소량 첨가해 효율은 떨어지지 않으면서 이런 물성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예전에 양 교수는 복잡하고 독특한 걸 추구했다. 새로운 물질을 합성할 때도 최소 10단계 이상은 거쳐야 ‘있어 보였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바뀌고 있다. 가능하면 쉽고 비용도 덜 들면서 효과를 내는 방법을 찾는 게 진정한 고수 아닐까. 예전에는 유연한 태양전지를 만들려면 당연히 유연한 광활성층 분자를 합성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기존 광활성층에 만들기 어렵지 않은 유연한 물질을 10% 정도 섞어 물성을 바꾸자는 쪽으로 사고가 유연해졌다.
새로운 분자를 창조하는 합성에 매료
한편 양 교수는 유기 반도체 소자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유기 반도체 역시 실리콘 반도체에 비해 손쉽고 값싸게 만들 수 있고 유연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럼에도 전하 이동도가 낮아 상용화가 어렵다. 양 교수팀은 지난해 11월 학술지 <앙게반테 케미>에 전하 이동도를 획기적으로 높인 유기 반도체 소자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이 연구는 그 과정이 재미있다. 원래 목표는 위치규칙성, 즉 구성 분자의 위치가 규칙적으로 배열된 고분자를 여럿 합성해 전하 이동도가 높은 조성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데이터 비교용으로 위치불규칙성 고분자도 함께 만들었다. 같은 단위 분자를 써도 규칙적으로 배열된 고분자라야 전하 이동도가 더 높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위치불규칙성 고분자의 전하 이동도가 오히려 두 배 가까이 더 높은 게 아닌가. 처음에는 데이터가 바뀐 줄 알았지만 반복 실험을 해도 결과는 같았다. 그 이유를 고민한 끝에 연구자들은 위치불규칙성 고분자가 3차원 구조의 관점에서는 전하를 더 잘 이동시킨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처럼 연구를 하다 보면 뜻밖의 결과도 나오고 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양 교수의 실험실은 달짝지근하면서도 약간은 날카로운 유기용매 냄새가 잔잔히 깔려 있다. 유기 일렉트로닉스 소자를 합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합성화학에 대한 그의 애정은 1999년 대학원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합성이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합성을 연구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의대에서 외과를 택하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그럼에도 양 교수가 합성에 매료된 건 다른 많은 과학이 ‘발견’에 관한 것이라면 합성은 자연에는 없는 새로운 분자를 ‘창조’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가장 예술성이 짙은 과학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양 교수의 꿈은 무엇일까. 물론 유기 일렉트로닉스 분야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이지만 가슴속에 품고 있는 소망은 자신의 이름을 붙인 반응을 개발하는 것이다.
“화학자의 이름이 붙은 많은 화학반응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화학자의 이름은 없어요. 그래서 제가 한번 도전해 보려고요.”
농담이라는 인상을 주려는지 쑥스러운 듯 살짝 웃었지만 그래서 더욱 간절한 소망이 느껴졌다. 한 세대 뒤 화학 교과서에 ‘양창덕 반응’이 실리기를 기대해 본다.
글_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며 <강석
기의 과학카페>,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를 저술했으며, 옮긴 책으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