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짝폴짝!” 동요 속에나 등장할 것 같은 의태어가 세계적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의 키워드가 됐다. 이자일 생명과학부 교수가 이끄는 바이오켐프(BioChemPh) 랩에서 손상된 DNA를 복구하는 단백질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데 성공한 것. ‘DNA 커튼’이라고 불리는 단분자 분광학 기술을 이용해 관찰해보니 이 단백질들은 장애물달리기 선수처럼 DNA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있었다. 연구실이 문을 연 지 만 3년 만의 첫 성과라고 한다.
바이오켐프(BioChemPh) 랩은 DNA와 관련된 모든 생명현상을 연구하는 연구실이다. 유전물질이 어떻게 복제되고 어떻게 단백질을 생성하는지, 손상된 DNA가 어떻게 복구되는지, 유전정보가 어떤 방식으로 섞이고 있는지를 분자 단위에서 연구하는 실험실이다. 이때 연구방법으로는 생물물리학적 기법이라는 아주 독특한 방법을 사용한다. 레이저와 현미경을 이용해 실제로 DNA와 단백질을 영상으로 촬영함으로써, 이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와글와글, 시끌벅적~ 즐거운 연구실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끌벅적한 분위기다. 전체 연구원이 네 명에 불과한데도 넓은 연구실이 꽉 찬 느낌이다.
“우리 교수님은 권위가 없어요.”
“인마, 권위가 없는 게 아니라 권위적이지 않다는 말이겠지.”
“우리 교수님은 엄격하지 않아요.”
“나 많이 엄격하다, 실험 대충 하면 바로 안면 바꿀 거다.”
통통 튀는 연구원들과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는 이 교수도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이다. 오랜 소통 속에서 쌓인 신뢰가 이들의 유머 코드를 탄탄하게 받쳐 주는 듯했다. 교수와 연구원들 사이에는 벽도 문턱도 보이지 않았다.
“학자의 권위는 교수라는 지위가 아니라 연구 역량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외의 부분에서 제가 권위를 내세울 만한 게 어디 있겠어요. 연구원들도, 저와 똑같은 사람인데 말이죠. 연구실에서 데이터나 실험을 지도하는 것 외에는 권위도 없고 엄격하지도 않습니다.”
학부 시절 이 교수의 분자생물학 수업을 들은 후 인턴으로 합류했다가 연구원으로 눌러앉았다는 강유진 연구원도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분위기 덕분에 연구실 선후배 사이에도 사수라는 개념보다 ‘동료’라는 개념이 강하다고 자랑한다.
“교수님은 어떤 아이디어를 말해도 실험에 반영되게끔 도와주세요. 학부생의 사소한 아이디어까지도 ‘좋은 생각이다. 한번 실험해볼 만하다’고 진지하게 받아주시죠. 저희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면 ‘오, 그거 괜찮은데 실험 한번 해볼까’ 이런 분위기에요. 교수님은 이런 점에서 ‘권위’와는 거리가 머시죠.”
이 교수는 학생들과 대화를 나눌 때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는 연구원들의 창의력 발현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창의력의 원천은 수많은 시행착오에 있어요. 경험상 창의력이란 천재성이 번뜩이는 한 방의 통찰력이 아니라 다양한 실험을 통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생기거든요. 이런 과정에서 굉장히 괜찮은 아이디어가 나오기 때문에 각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생각들을 막아버리면 창의력이 구현되기 힘들어요.”
DNA 손상 찾는 단백질 원리 규명
연구실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 바로 ‘DNA 손상 부위를 찾아다니는 단백질의 이동원리’를 밝혀낸 논문이다. ‘DNA 커튼’이라고 불리는 단분자 분광학 기술을 이용해 DNA 위에서 움직이는 XPC-RAD23B 단백질을 실시간으로 확인한 것이다.
“DNA는 매우 긴 물질인데 여기에 수많은 종류의 단백질이 붙어서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어요. 손상 복구 단백질도 그중 하나입니다. DNA가 손상을 입었다는 건 돌연변이가 생겼다는 뜻이기 때문에 빠르고 정확하게 복구해야 유전정보가 손실되지 않아요. 그런데 워낙 많은 종류의 단백질이 DNA에 붙어있기 때문에 이들을 피해 움직이려면 힘들겠죠. 그래서 DNA가 손상을 입었을 때 찾아가는 단백질이 뛰어다닐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학계에 존재했지만 그걸 실제로 관찰한 적은 아직 없습니다. 이번 연구를 통해 손상 복구 단백질이 다른 단백질들을 폴짝폴짝 뛰어넘는 걸 확인했어요.”
최초로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단백질을 관찰했을 때의 소감을 물었다. 이자일 교수는 ‘과연 그렇구나, 가설이 사실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담담하게 말했지만 천나영 연구원은 “DNA와 결합하는 단백질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고는 교수님도 같이 폴짝폴짝 뛰었다”고 귀띔했다.
“일반적인 생물학 실험실은 세포 단위로 연구를 하지만 우리 연구실에서는 커튼 테크닉으로 그보다 훨씬 작은 ‘분자’ 단위의 연구를 할 수 있습니다. 세포 단위 연구가 인공위성으로 지구를 넓게 관찰하는 것이라면 우리 연구실은 카메라 하나를 들고 지구인 한 명을 찍는 것에 비유할 만큼 아주 작은 단위의 물질을 관찰하는 거죠. 이런 점이 마음에 들어서 연구실에 합류했어요.”
이번 논문의 제1저자이기도 한 천나영 연구원은 과학 역사에 남을 만한 현장을 함께하는 것이 꿈이라며 “우리 연구실에서 그 꿈을 이루고 싶다”고 전했다.
연구실의 제일 비싼 자산은 ‘연구원’
이 교수는 연구실의 가장 큰 자산으로 연구원을 꼽았다.
“제 학생들은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습니다. 단적인 예로 실험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보통은 교수가 시킨 일을 끝내면 또 다른 임무를 줄때까지 가만히 기다리죠. 그런데 우리 학생은 먼저 제게 다가와 ‘이거 한번해볼까요’라고 제안해요. 이게 말이 쉽지 전 세계 어디를 다녀봐도 이런 학생들 만나기가 드뭅니다. 하버드대에 가도 게으른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이런 태도는 박사 과정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라며 이제 막 연구의 걸음마를 뗀 학생들이 벌써 이런 마음가짐을 가졌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라고 이 교수는 재자 강조했다. 연구원을 뽑을 때도 연구의지가 있고 약속을 지킬 줄 알며 성실한 학생 위주로 뽑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제일 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시대가 됐어요. 우리가 연구하는 연구결과가 세계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시대입니다. 전 세계 누구와 비교해도 ‘이 분야에서는 내가 최고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고민이 생겼다고 한다. 좀 더 많은 연구원이 합류하기를 바라지만 생물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사이에 ‘분자생물물리학이 어렵다’는 선입견이 다소 있단다.
“생물학 전공 학생들 사이에 물리학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 같아요. 연구시스템을 갖추는 데 물리적 개념이 필요한 건데 이미 그건 제가 다 구축해놨어요. 연구를 위해 물리적 도구를 이용하는 데는 한 달 정도면 충분하니미리 겁먹지 마세요.”
재미있는 연구 아이디어들이 아주 많다며 연구실에 합류하면 흥미진진한 실험을 아주 많이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 교수. 연구실 오픈 3년 차에 벌써 세계적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할 만큼 실험에 열정을 쏟는 연구원들. 어느 연구원의 바람처럼 과학의 역사에 남을 역사적 장면들이 바이오켐프(BioChemPh) 랩에서 속출하기를 기대해 본다.
[Mini Interview]
분자생물학에 관심 있는 학생들을 위한 즐거운 연구와 실험의 장
이자일 생명과학부 교수
Q. 바이오켐프(BioChemPh)랩에 관심 있는 학생들에게 한마디?
A. 우리 연구실에서는 학문적으로는 근원을 파고드는 연구를 하고 있어요. 요즘 생물학의 추세가 어떤 현상을 보고 그것을 분자 수준에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연구실에서 바로 그런 분야를 연구합니다. 연구결과가 상대적으로 빨리 나오는 것도 장점입니다. 이번에 낸 논문도 1년 반 만에 결과가 나온 것이고 막바지 수정 작업 중인 다른 논문도 있어요. 논문이 빠른 만큼 졸업도 빠르겠죠. 그런데 이런 장점에 혹해서 무작정 오면 안 됩니다. 분자생물학에 정말로 관심 있는 학생들이 와야 재미있게 연구할 수 있으니까요.
Q. 연구원들이 꼭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A. 성실과 약속은 우리 연구원들의 기본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학자로서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 실험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이지만 그 과정은 아주 지루한 일입니다. 지루한 실험이 반복되면 유혹에 빠지기 쉬워요. 우리 실험실에서도 엄청나게 실험을 반복해 얻은 데이터를 모두 버린 적이 있어요. 대조군(negative control) 실험결과가 나오지 않았거든요. 못 쓰는 데이터는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Q. 앞으로의 연구계획이 궁금합니다.
A. 지금 우리가 관찰한 것은 단순히 단백질이 폴짝폴짝 뛰는 것만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폴짝폴짝 뛰어서 손상 부위를 찾아가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실제 세포 속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직접 눈으로 관찰해 어떻게 단백질이 제대로 자기 일을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남은 과제입니다. 세포 속, 특히 세포질에서 단백질 분자들의 움직임을 관찰한 후 세포핵 내부에서 DNA와 각 단백질의 상호작용을 직접 관찰하는 것이 제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