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은 바닷속에서 먹이를 사냥해야 한다. 하지만 바다에는 바다표범, 범고래 같은 천적이 많다. 그래서 펭귄들은 바다에 들어갈 때 머뭇거리고 망설인다. 그러다 용감한 한 마리가 먼저 뛰어들면 다른 펭귄들도 모두 함께 바다로 뛰어든다. 이렇게 맨 처음 뛰어드는 펭귄을 ‘퍼스트 펭귄’이라고 한다. 용기와 꿈이 있는 자가 미지의 세계를 개척할 수 있는 법. 실험실에서 연구에 매진하던 연구원이 창업에 도전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UNIST 연구원 창업기업 1호 이노플라즈텍 이덕연 대표의 모습에서 퍼스트 펭귄이 떠오르는 이유다.
‘혁신(Innovation), 플라즈마(Plasma), 기술(Technology)’이라는 뜻을 담은 이노플라즈텍은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의 이덕연 연구원이 2018년 11월에 창업한 벤처기업이다. 이 기업의 핵심은 이름 그대로 혁신적 플라즈마 기술이다. 플라즈마를 이용해 탄소나노분말의 표면처리에 활용하면 기존보다 뛰어난 성능을 발휘하는 제품 개발이 가능하다.
혁신적인 플라즈마 기술로 세상을 이롭게 하다
우리 주변의 전기·전자제품은 점점 작아지고, 가벼워지고, 얇아짐은 물론 접을 수도 있게 됐다. 동시에 열을 잘 방출하거나 전자파 차폐 등의 기능도 요구된다. 신소재에 대한 이런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단일소재로는 불가능하고 여러 가지 소재의 장점을 결합해 활용할 수 있는 ‘복합소재’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현재 복합소재로 가장 각광받는 것은 탄소섬유강화 플라스틱 소재(CFRP)로, 강철보다 강도가 높으면서도 가벼워 항공기나 자동차 부품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탄소섬유보다 강도가 500배, 열전도도 40배, 전기전도도는 188배나 되면서도 무게는 절반 수준인 소재가 있다. 바로 ‘탄소나노튜브(CNT)’다.
하지만 탄소나노튜브는 다발 형태로 뭉쳐져 있고, 표면에 작용기를 형성하기 어려워서 균일한 분산이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 뛰어난 특성에도 불구하고 복합소재에 활용될 때 성능이 떨어지는 것이다. 제대로 활용하면 매우 큰 파급효과를 낼 소재인 탄소나노튜브.
이덕연 대표는 바로 여기에 도전했다. ‘부착형 플라즈마 표면처리기술’을 자체 개발해 탄소나노튜브의 성능을 향상할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이덕연 대표의 기술은 나노 크기의 구멍이 있는 필터전극에 탄소나노튜브분말을 붙인 후 플라즈마로 표면처리하는 방법을 이용한다. 나노분말과 플라즈마가 직접 접촉되므로 기능화 효율이 높고, 실시간 순환반복처리를 통해 나노분말 전체에 균일한 처리가 가능해 탄소나노튜브의 활용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이노플라즈텍은 자체 개발한 플라즈마 장비를 이용해 표면처리한 탄소나노분말을 판매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운영한다. 실험실, 분말생산업체, 제품생산업체 등에 기능화된 탄소나노분말을 제공하는 B2B 사업모델이다. 또한 연구용 나노분말용 표면처리 장비를 사업화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탄소나노튜브 분말을 분산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기존 방식들은 비효율적이기도 하고, 소재가 손상돼 제품에 적용됐을 때 성능향상에 제한이 있는 등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최근 상용화된 분산기술들은 다발상태로 존재하는 탄소나노튜브를 풀어내거나 작게 분쇄하는 방식들인데, 탄소나노튜브표면에 작용기를 형성시킬 수 있는 양산기술은 플라즈마 표면처리 외에는 없습니다. 저희 회사는 새로운 분말용 플라즈마 표면처리기술을 확보하고 있으며, 양산처리기술 개발에 성공하면 탄소나노튜브를 사업화할 수 있는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추게 됩니다.”
이노플라즈텍은 총 5단계에 걸쳐 플라즈마 처리 장비 개발을 고도화할 계획이다. 이 대표는 최종 5세대 연속식 양산장비가 구현되면 분말의 표면처리나 코팅에 사용하고 있는 기존의 습식공정을 대체해 분말표면처리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재 양산장비의 개발단계는 2.5세대에 와 있다. 진행 중인 장비 최적화 과정이 마무리되면 금호석유화학과 함께 표면처리된 분말을 실제 복합소재에 적용해보는 성능 테스트도 진행할 계획이다. 이 대표는 국내 시장은 물론 해외 시장에도 연구용 표면처리 장비 판매를 염두에 두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전시회나 학회를 통해 홍보하고 판로를 개척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시장규모도 크고 다양한 분야에 적용 가능한 소재와 기술이기에, 이 대표는 “망하기도 쉽지 않다”는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이노플라즈텍의 미래를 확신하고 있다.
UNIST에서 배운 도전, 창업의 원천이 되다
결혼을 계기로 아내의 직장이 위치한 울산에 자리 잡은 이 대표는 그동안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플라즈마 연구를 해온 이력을 살려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연구원으로 UNIST와 인연을 맺었다. 평생 연구자의 삶을 사는 것을 당연히 여겼는데, 구성원들의 창업을 지원하고 육성하는 UNIST 분위기가 그를사업가로 도전하게 했다.
“사업이라는 새로운 적성을 발견하고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UNIST덕분입니다. 기술경영전문대학원에서 운영하는 기술사업화아카데미 2기 모집 공고를 본 것이 시작이었어요. 3개월 과정이 무료라고 해서 ‘창업에 대해 배워나 보자’라는 마음으로 가볍게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이전 직장에서 초기에 연구개발을 진행했다가 포기했던 기술을 사업화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실리콘밸리에서 투자하는 분이 강의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창업을 시작하는 회사들이 20% 정도의 기술 완성도를 갖고 출발해 치열한 노력으로 100%를 채운다고 합니다. 수료 후 제 아이템이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나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지난해 4월 울산창조경제혁신센터-현대중공업 기술공모전에서 대상을 받고 창업이 구체화됐죠. 제게 사업가 기질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어요.”
공모전 수상으로 울산창조경제혁신센터의 지원을 받게 된 이덕연 대표는 시제품을 제작하고, 다양한 창업교육, 정보, 멘토링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사업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무턱대고 창업을 밀어붙이기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준비과정을 탄탄히 하면 모든 것이 자산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올해 5월에는 기업부설연구소 설립, 6월에는 벤처기업인증을 받았고, 기술사업화 아카데미 교육을 담당했던 선보엔젤파트너스로부터 초기 시드 투자를 받았다. 창업한 지 1년 이내에 이루어진 결과다. 이 대표의 성실함과 이노플라즈텍의 성장 가능성은 적극적인 투자와 보증 유치로 이어져 사업전망에 청신호를 켰다. 지난 10월에는 신용보증기금이 성장 가능성이 있는 기업을 보증·지원하는 퍼스트 펭귄 프로그램에 선정되며 자금지원을 받았고, 내년에는 정부에서 지원하는 소재·부품·장비 강소 100대 스타트기업 선정을 준비하고 있다.
수많은 경험과 정보가 창업의 벽을 낮춘다
“저도 UNIST 학생들과 비슷한 과정을 거쳤지요. 핵융합을 견딜 수 있는 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금속공학과를 선택했고, 집보다 연구실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냈으니까요. 그런데 창업이라는 게 연구와는 다른 새로운 세상이라는 걸 느낍니다. 창업을 준비한 시간까지 더하면 1년 반 정도 지났는데 그 시간 동안 저 자신도 많이 변했습니다. 간절하게 이루고 싶은 목표가 생기니까 더 부지런해졌어요. 도움이 될만한 게 있으면 전국 각지를 쫓아다니며 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거든요. 창업은 실패하더라도 경험 있는 사람에게 더 가치를 둔다는 걸 배웠습니다. 하면 할수록 득이 되기에 경력만 잘 쌓으면 뭘 해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창업을 꿈꾸는 학생이 있다면 일단 스타트업 회사에서 경험을 쌓고 관련 정보를 많이 수집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준비를 잘해서 시작하는 것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고, 사업의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거든요.”
아울러 이 대표는 UNIST 학생들이 이노플라즈텍에도 관심을 가져주길 당부했다. 지난 4월 UNIST의 청년 TLO 육성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사업가속화를 위해서 인재영입이 필요한 상황이란다. 이 대표는 이노플라즈텍이 지금은 작지만 파급력을 지닌 회사이기에 호기심과 도전 의식을 탑재한 UNIST 학생이 일원으로 오길 바란다고 피력했다. 야근을 반기지 않고 스트레스 없는 즐거운 회사라 소개하며, 직원들에게 확실한 보상이 있는 회사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노플라즈텍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더해지면 플라즈마 관련 기술과 산업을 발전시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디딤돌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