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0년 11월 24일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 KSTAR연구센터는 인공태양 KSTAR에서 핵융합의 조건인 1억도 이상의 플라스마를 20초 이상 연속 운전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지난해 센터가 세운 세계 기록인 8초를 두 배나 넘는 신기록이다. 이 결과에 누구보다도 기뻐할 사람이 바로 박현거 물리학과 교수가 아닐까. 그는 2015년~17년 KSTAR연구센터장을 지냈고 지금도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인 최초로 ‘찬드라세카 상’을 수상하고, 핵융합 플라스마 연구에 뜨거운 열정으로 헌신해 온 박현거 교수를 만나보았다.
우연한 계기, 필연이 되다
부산 영도에서 태어난 박현거 교수는 중고교 시절, 수학이나 물리처럼 이론 위주의 공부를 좋아했고 외우는 건 질색이었다. 고3이 되자 과학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이치를 다루는 물리학에 심취했고, 1969 년 서강대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1학년 2학기가 끝날 무렵 강의시간에 한 교수님이 “미래에는 플라스마 물리학이 인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말하며 핵융합 발전의 개념을 설명했다.이때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플라스마 물리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만일 그날 그 수업에 빠졌거나, 교수님이 강의 중 플라스마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박 교수의 삶은 지금과 꽤 다르게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과학은 걸음마 수준이었고 특히 플라스마 물리학은 배울 곳이 없었다. 반면 냉전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미국과 러시아(당시 소련)에서는 1950년대부터 플라스마 물리학 연구 열기가 뜨거웠다. 고민하던 박 교수는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대학 3년을 마치고 군 복무를 하며 틈틈이 유학 준비를 했고 다행히 남캘리포니아대 물리학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대학원 유학이 아닌, 학부 편입 유학을 선택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1978년 졸업 뒤 LA캘리포니아대 대학원에 진학한 박 교수는 본격적으로 플라스마 물리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플라스마 측정 장비를 만들고 실험 데이터를 해석하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1984년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6년 동안 논문을 15편이나 썼다. 대학원생으로는 대단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졸업 후, 당시 플라스마 연구자 들이 꿈의 직장으로 여기던 프린스턴플라스마물리학연구소(PPPL)에 들어갈 수 있었다.
초고속 마이크로파 2차원 영상 장치 개발
“2007년 한국으로 들어올 때까지 23년을 PPPL에서 보냈습니다. 특히 제가 책임자로 그룹을 이끌며 최초로 플라스마 2차원 영상진단기술을 개발하기도 한 후반 10년이 연구자로서 제 인생의 황금기였죠.”
플라스마는 원자가 그 구성단위인 원자핵과 전자로 분리된 불안정 한 상태로, 핵융합이 일어나려면 플라스마 온도가 1억도까지 올라가 야 한다. 즉 중수소원자핵과 삼중수소원자핵이 만나 헬륨핵이 만들 어지고 이때 튀어나오는 고에너지 중성자가 물을 데워 전기를 만드 는 게 바로 핵융합 발전이다. 이론은 간단하지만 이를 실제 구현하 는 건 전혀 다른 얘기다.
핵융합 발전 연구 역사가 70년에 이르지만 아직까지도 상용화 가능성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여전한 이유다.
핵융합 발전이 실현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먼저 플라스마가 장시간 안정적으로 유지돼야 하고 다음으로 반응에서 나오는 헬륨원자핵의 에너지가 충분히 커서 열원으로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 이번에 KSTAR의 ‘20초 이상 연속 운전 성공’이 기록인 것만 봐도 플라스마 안정성 유지가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KSTAR나 현재 프랑스가 짓고 있는 국제핵융합실험로(ITER)는 모두 도넛 형태의 토카막 핵융합 장치로, 내부에 고온 플라스마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방법을 찾는 게 주요 연구과제다. 고온 플라스마는 불안정한 자기유체운동으로 에너지를 방출하며 붕괴하는 일이 일어나는데 사실상 이를 예측할 수 없다. 붕괴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많고 복잡해 이론적으로 해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카막 내부의 플라스마를 최대한 정확하게 측정한 뒤 이를 해석해 모형을 세우고 시뮬레이션으로 검증해 다듬는 과정을 반복해야 고온 플라스마의 거동을 이해할 수 있고 장시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1차원 측정은 비선형물리에 따라 움직이는 플라스마의 빠른 역동성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PPPL의 박 교수 그룹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2년 초고속 마이크로파 2차원 전자영상 장치를 개발했다. 즉 고온 플라스마를 찍어 토카막 단면(2차원)의 영상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 장치를 독일 핵융합실험로인 텍스토르(TEXTOR)에 설치해 ‘톱니불안정성(sawtooth instability)’이라는 불안정성 현상의 선명한 2차원 영상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 해석한 연구결과는 저명한 학술지인 <피지컬 리뷰 레터스(Physical Review Letters, PRL)>에 논문 두 편으로 나뉘어 실려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KSTAR와 함께 한 10여 년
이처럼 플라스마 물리학자로 명성이 높아지고 있었지만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플라스마 물리학의 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가 유학을 떠난 뒤에도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핵융합 발전은 일부 선진국 얘기였다.
그런데 1990년대 정근모 과기부 장관이 우리나라도 미래의 에너지원인 핵융합 발전 연구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결국 이 주장은 받아들여졌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다국적 프로젝트인 ITER 건설에 참여했고, 국내에는 핵융합실험로 KSTAR를 만들기로 했다. 그 당시에는 돈 낭비라는 비난도 많았지만, 이경수 박사(KSTAR 프로젝트 총괄책 임자)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박 교수도 KSTAR 프로젝트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KSTAR가 완공될 무렵 한국으로 돌아와 힘을 보태달라는 제안을 받은 그는 23년 동안의 PPPL 생활을 접고 2007년 포항공대에 부임했다.
KSTAR는 최고의 기술력이 동원된 초전도 핵융합 장치였지만 완공을 앞두고 연구비와 전문 인력이 부족해 제대로 운영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박 교수팀은 서둘러 KSTAR에 맞는 영상진단 장치를 설계해 제작에 들어갔다. 그 결과 KSTAR는 2008년 첫 가동을 시작한 이후 많은 데이터를 내놓았고 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플라스마 이론에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고온 플라스마 불안정성의 대표적인 현상인 톱니불안정성은 1976년 러시아(당시 소련)의 물리학자 보리스 카돔체프가 이를 설명하는 이론을 제시했지만 40년 동안 논란이 계속됐다. 플라스마 진단 결과, 이 이론에 맞지 않는 현상이 관찰됐고 그 대안으로 여러 이론이 등장했다. 박 교수팀은 KSTAR 실험을 통해 과거 측정은 불완전한 진단 장치의 결과임을 밝혔고 카돔체프의 이론이 큰 틀에서 맞는다는 결론을 얻었다. 한편 KSTAR 운영 경험은 진공 용기나 전원장치 등 여러 측면에서 ITER 건설에 도움을 주고 있다. 지난 2013년 UNIST 물리학과로 자리를 옮긴 박 교수는 플라스마 연구를 이어나가면서 KSTAR에 힘을 더 쏟았고, 2015년부터 2년 동안 센터장을 겸임하기도 했다.
오늘날 KSTAR가 핵융합 연구에서 각종 기록을 세우며 ‘스타’가 된 배경에는 박 교수를 비롯한 연구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2020 찬드라세카 상’ 수상
1984년 대학원 생활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36년 동안 박 교수는 무려 33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특히 지난해 학술지 <어드밴시스 인 피직스(Advances in Physics: X)>에 발표한 ‘2차원 영상 진단기술을 이용한 플라스마 자기유체운동 불안정성 규명’을 주제로 한 그의 단독 저자 리뷰논문은 이 분야의 연구를 총정리한 역작으로 무려 65쪽에 이른다.
지난 2020년 9월 박 교수는 한국인 최초로 플라스마 물리학 분야의 3대 학술상 가운데 하나인 ‘찬드라세카 상’을 수상했다. 플라스마 진단 분야에 기여한 그의 공로가 인정받은 것이다. 2019년 리뷰논문과 2020년 수상은 올해 정년을 맞는 박 교수에게 과학자로서의 그의 삶이 충만했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인 셈이다. 현재 ITER 건설은 68% 공정이 진행되었고 2025년 완공될 예정이 다. 그 뒤 가동에 들어가 다양한 실험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분석해 토카막 방식의 핵융합 발전이 상용성이 있는가에 대한 최종 평가를 한다.
“2040년 무렵이면 결론이 나올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어떤 방향일지 판단할 수 없지만, 저로서야 물론 긍정적인 답을 얻으면 좋겠죠.”
ITER 실험이 성공한다면 본격적인 핵융합 발전소 건설이 시작될 것 이고 21세기 하반기에 인류는 핵융합으로 에너지를 얻는 시대에 들어갈 것이다.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많은 과학자들이 흘린 땀방울이 인류의 삶과 지구의 미래를 바꾼다고 생각하면 뿌듯한 일이다.
마음 속 뜨거운 열정을 따를 것
박 교수는 포항공대에서 6년과 UNIST에서의 7년을 합쳐 12년 동안 학생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무척 보람 있는 시간을 보냈다. 얼핏 생각하면 핵융합 연구는 장치가 중요한 전형적인 빅사이언스 같지 만, 박 교수는 그보다 인적 자원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서는 젊은 과학자들이 자부심을 갖고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합니다.”
그는 학생들이 시류를 따르지 말고 자신이 열정을 갖고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사소한 이익이나 손해를 따지면서 별로 가고 싶지 않은 길을 간다면, 제3자의 눈에는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본인이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그 분야에서도 ‘본질적인 기여’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과학자 가운데서도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아 안타깝다고 한다.
“1969년 학부 1학년 때 우연히 알게 된 플라스마 물리학이 제 인생을 결정지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제가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행운아입니다.”
글_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 졸업. LG생활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 2000년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활동.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며 <강석기의 과학카페>,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를 저술. 옮긴 책으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