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의 힘은 예쁘고 보기 좋은 모양새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디자이너는 물건을 사용할 사용자의 취향과 습관을 고려하는 배려심은 물론 고객의 라이프 스타일을 설계하고 제품에 관한 모든 것을 파악하는 총체적 사고를 해야 한다. 단 하나의 제품을 위해 세상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디자이너에게 융합적 사고와 창의력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30여 년 동안 디자인 연구와 전략에 대해 가르치다 지난 9월 UNIST로 부임했다. 네덜란드 델프트공대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그 학교의 강점을 활용해 학생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방향에 대해 고민했다. 또 학교 내 소모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사람들이 가진 고민과 문제점을 해결하는 일에 열정을 쏟아왔다. 그런 필자가 UNIST로 적을 옮긴 이유는 이 학교의 슬로건인 ‘First in Change’가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UNIST의 슬로건은 필자 삶의 신조 ‘To bring Change’와 닮았다. 평생 추구해왔던 도전과 변화를 새로운 환경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기쁨에 기꺼이 UNIST를 선택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새로 맡게 된 UNIST 디자인학부와 학부장으로서의 청사진을 그려보려 한다.
뫼비우스의 띠지를 연결하는 통합적 디자인
이곳에 부임하기 전 포르투갈에 있는 민호대에서 디자인 학부를 구축하는 작업을 한 적이 있다. 산업디자인 학부가 없던 민호대에서는 디자인 분야 교육을 시작하려 했고, 필자를 비롯한 몇몇 전문가가 참여해 조언했다. 대부분의 디자인 학부가 미학이나 예술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민호대는 그런 방식에서 벗어났다. UNIST처럼 공학을 기반으로 디자인을 결합한 형태로 꾸린 것이다. 이런 형태의 교육은 결국 포르투갈의 산업 분야에도 힘이 되는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데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필자가 델프트공대에서 진행한 교육과정 중 ‘소규모 상점 디자인(retail design)’이라는 게 있다. 상품을 판매하려면 제품뿐 아니라 판매 공간의 건축과 인테리어까지 통합적으로 설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마련한 과정이다. 여기서 배운 학생들은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는 눈을 기를 수 있었고, 통합적인 사고를 익히게 됐다. 이 과정을 진행하며 필자는 ‘창의적인 디자인 스쿨’의 방향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
UNIST 디자인 및 인간공학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위의 두 가지 사례와 맥을 같이 한다. 우선 공학 기반의 디자인 교육을 통해 세상에 쓸모 있는 솔루션을 내놓으려 한다. 우리에게 당면한 어려운 문제를 돌파하고 혁신과 성장을 주도할 키워드가 바로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업의 핵심은 ‘사용자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하느냐’에 있다. 그리고 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가치 있을수록 그 필요성은 점점 커진다. 이 문제에서 디자인은 더 특별한 방식으로 가치를 창조하는 역할을 한다.
이때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거나 이전보다 좋아 보이는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디자인은 혁신이 필요한 순간 나타나는 전략과 창의성을 융합시킨 그 무엇이어야만 한다. 소규모 상점 디자인 과정에서 보였던 것처럼 전체를 바라보는 통합적 사고가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학문별로 쪼개져 있는 학부 내 교육과정을 연결하고 통합해 최대한의 창의성을 끌어낼 수 있는 커리큘럼을 짤 계획이다.
공학과 디자인의 융합, 창의적 디자이너를 탄생시키다
통합적 사고는 결국 디자인 교육에 대한 다른 도전으로 이어진다. 미국이나 유럽에 위치한 대부분의 디자인 학부들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연구가 실제 디자인보다 더 중요해 보인다. 하지만 대학 내 디자인 학부가 집중해야 할 것은 연구결과를 내는 게 아닌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고도화된 교육이 이뤄지는 한국이지만, 학교 내 시스템은 산업 수요를 만족시킬 만한 인재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현재 커리큘럼에서 창의성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창의성 교육이 극대화된 커리큘럼으로 배운 학생들은 디자인 연구를 통해 우리가 생활하는 사회와 산업 전반에 기여할 수 있다.
우리가 누리는 다양한 디자인 요소들은 그동안 디자인과 인체공학에 대해, 디자인을 접하는 인간에 대해 수없이 고민한 결과 나온 것이다. 어떻게 보이는가를 디자인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디자인하게 되면 그 순간 혁신이 일어난다. 디자이너들이 과학기술 잡지를 통해 공학을 접하게 되면 디자이너로서 추구해야 할 목표지점과 멀어진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디자이너는 응용 측면에서 더 많은 통찰을 가지고 아이디어를 모아야 한다.
UNIST, 혁신적 디자이너의 요람이 되다
디자인은 과학적 연구를 사용자들을 위해 유용한 제품과 서비스로 옮기는 과정 중 가장 생산적인 부분이자 최후에 통과해야 할 지점이다. 사람들은 다양한 방향에서 혁신을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을 앞둔 UNIST 디자인 및 인간공학부는 다가오는 미래에 맞서는 특별한 답이 될 것이다.
2011년 UNIST에서 열린 워크숍에 참여하면서부터 그러한 가능성을 느꼈다. 당시 울산이라는 도시를 처음 방문한 나에게 UNIST는 새로운 감동을 선사했다. 생긴 지 3년 밖에 안 된 학교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시설과 교육체계 등이 잘 갖춰져 있었고, 연구 분야에서도 좋은 성과를 내고 있었다. UNIST에서의 새로운 시작이 기대되는 이유다.
글_헨리 크리스티안스 디자인 및 인간공학부 학부장
세계적인 디자인 석학 헨리 크리스티안스(Henri H.C.M. Christiaans) 박사는 지난 9월 1일, UNIST 디자인 및 인간공학부의 신임 학부장으로 부임했다. 크리스티안스 학부장은 네덜란드 델프트공대 산업디자인공학대학과 포르투갈의 디자인공학 스쿨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디자인 교육과 정보처리, 인지과학, 인체공학 분야에서 30년이 넘는 경력을 가지고 있는 크리스티안스 학부장은 전 세계 다양한 나라에서 디자인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다. 네덜란드는 물론 아시아, 남미, 남유럽 등에서 디자인 혁신 프로젝트를 수행한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Journal of Design Research’ 의 공동설립자이자 편집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