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학부 조윤경 교수는 2009년 UNIST 개교 당시 ‘홍일점’ 멤버였다. 여성이라는 사실은 캠퍼스에서 눈에 띄는 이유가 됐지만, 연구자로 사는 데 성별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강단에 서면서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그녀를 롤 모델로 꼽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여성 과학자의 삶에 대해 물어오는 사람도 늘었다. 지난해 연말에는 동료 교수들과 함께 이공계 진학을 희망하는 여고생들에게 조언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그저 과학자의 길을 걸었을 뿐이지만 이제는 자연스레 여성 과학자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까지 고민하게 된 것이다.
여성 과학자? 아니, 그냥 과학자!
‘여성’인 성별을 가진 과학자이긴 하지만 조윤경 교수는 그동안 자신의 성별을 따로 인식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학생이었고 실험실에서는 연구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UNIST에 터를 잡고, 생명과학부를 대표하는 학부장이 되면서 성별에 따른 질문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여자라서 힘든 적은 없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가장 높은 빈도를 차지했다. 여기에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실험실에서도 약자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드러나 있었다.
질문을 받고 조윤경 교수는 자신의 과거를 곱씹어 보기 시작했다. 여성이라서 과학자가 되고 연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는지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봐도 훌륭한 과학자가 되는 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별보다도 열정과 실력이었다.
“과학계는 냉정해요. 과학자는 오로지 연구 성과로 평가받을 뿐이에요. 스스로 선택한 길, 그 여정을 즐기고 최선을 다할 때 세계적인 과학자의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요.” 여성 과학도로서 화학공학을 공부하고, 기업에서 생명공학을 연구하고, 현재 UNIST 생명과학부의 수장이 되기까지 자신은 여성 과학자가 아닌 과학자로서 존재했을 뿐이다.
엄마가 된 과학자의 선택
조 교수는 ‘과학자에게 성별보다도 실력과 열정이 훨씬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임신과 출산, 육아 등 평범한 여성이 해내는 일들을 겪었다. 특히 첫 아이는 한창 학업에 열중하던 중에 출산하는 바람에 어려움이 더 컸다.
첫 아이를 낳고 기른 경험은 큰 깨달음을 줬다. 조 교수는 미국 일리노이주 어바나-샴페인캠퍼스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마지막 학기에 첫 아이를 낳았다. 어쩔 수 없이 육아와 연구를 병행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한창 힘이 들어 지쳐 있었을 때 문득 그녀의 머릿 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나중에 스무 살이 된 딸에게 ‘너에게 헌신하기 위해 엄마가 많은 것을 포기했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졌어요. 아마도 우리 딸은 ‘엄마, 왜 그랬어? 누가 그러래?’ 이렇게 말할 것 같았죠.”
그래서 그녀는 지금 당장 아이의 백점짜리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조금 멀리 보고, 자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자고 결정했다.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조 교수는 “적은 시간이라도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아이들을 키웠다”고 말했다. 바쁜 엄마 덕분에 자녀들은 자기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는 독립적인 아이들로 자랐다.
엄마로서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듯 연구도 같은 마음가짐으로 접근했다. 그녀는 “아이들을 기르는 것처럼 연구도 집중력이 중요하다”며 “연구에 할애하는 절대적인 시간보다 실제 집중하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시작이 반! 문제를 알았다면 반은 해결됐다
“육아부터 연구까지 모든 걸 자신의 힘으로 이겨내려는 ‘슈퍼우먼 콤플렉스’를 가진 여성 과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문제들은 최고는 아니더라도 최선의 선택으로도 해결되는 경우가 많아요.”
조 교수는 난관에 부딪혔을 때 괜한 자존심으로 굳이 어려운 길을 선택하기보다는 마음의 근육을 풀고 좀 더 유연한 선택을 하길 권한다. 지금 조금 천천히 가도 나중에 다시 뛸 수 있으니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오히려 어려움이 촉매제가 돼 연구자로서 더 크게 성장할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게 그녀의 조언이다. 조 교수 역시 지금 돌이켜보면 육아와 연구를 병행했던 힘들었던 시기가 큰 자산으로 남았다.
“당시엔 정말 하루에 단 1분도 허투루 쓰지 않고 살았어요. 이때 여러 일로 바빠도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안 좋은 일은 쉽게 잊어버리는 습관이 생긴 것 같아요. 할 일이 아무리 많아도 중요한 일을 골라서 집중하면,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걸 몸소 배웠죠.”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며 이어나가는 연구는 양질의 결과를 이끌어낸다. 물론 이를 가능케 하는 매개체는 연구자의 강한 의지와 뚜렷한 주인의식이다. 더 멀리 보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어느새 높은 봉우리를 하나 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조 교수는 “누구나 당면한 문제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힘든 일이 생기고 지난 일은 비교적 쉬운 일로 기억되는 법”이라며 “오늘 산더미처럼 쌓인 문제를 당장 해결해야만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면 마음의 부담을 덜어내라”고 조언했다.
그녀는 이어 “현재 어려움을 겪는 후배들이 섣불리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며 “결국 과학자의 이름은 성별이 아닌 연구 성과로 남게 되는 만큼 최선의 선택으로 꾸준히 노력하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