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후반 등장했던 일본만화에는 종종 작가들이 상상하는 미래 세계가 그려졌다. 이 중에는 과학이 고도로 발전한 세상에서 존경받던 지성인이 사고로 죽자 그의 뇌를 복원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죽은 이의 기억과 지식들을 되살린 것이다. 그 당시 이런 일들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거나,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됐다. 그런데 ‘뇌 지도’가 완성되면 이런 일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누군가의 뇌에 담겼던 생각을 재현하고 기억을 살려낼 수 있는 뇌 지도의 바탕에는 비주얼 컴퓨팅 기술이 숨어 있다.
지하철 노선도 한 장만 손에 쥐면 서울, 파리, 뉴욕 어디든 마음껏 누빌 수 있다. 지도 속에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머릿속도 마찬가지다. 뇌의 각 부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려 넣은 ‘뇌 지도’만 있으면 누군가의 머릿속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런 뇌 지도를 그리는 세계적인 석학이 있다. 지난 7월 15일 UNIST를 방문한 하버드대 한스피터 피스터(Hanspeter Pfister) 교수다. 그는 나날이 발전하는 컴퓨터 기술로 눈에 보이지 않는 내용을 그려내는 ‘비주얼 컴퓨팅(Visual Computing)’ 분야의 대가다. UNIST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정원기 교수도 한스피터 교수와 함께 이 분야에서 활약하는 젊은 연구자로 꼽힌다. 이들은 뇌의 구조와 기능을 파악한 자료를 바탕으로 뇌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지도를 구현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사람 뇌 꼭 닮은 ‘디지털 뇌’ VS 뉴런 활동 살피는 ‘비주얼 컴퓨팅’
일반적인 지도가 그렇듯 뇌 지도 역시 구조와 기능을 파악해야 그릴 수 있다. 최근 과학자들은 사람의 뇌 구조와 기능을 연구하기 위해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다. 하나는 뇌를 분해해 기본적인 구조를 알아낸 다음 ‘디지털 뇌’를 만드는 방식이다. 이 분야에서 대표적인 연구자는 스위스 로잔연방공대 신경과학과 헨리 마크램(Henry Markram) 교수다. 그는 뇌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상공간에 구현하기 위해 인간 뇌 프로젝트(HBP)를 진행하고 있다.
뇌 속 신경세포인 뉴런의 연결 상태와 전기적 활동을 파악하는 방법도 있다. 이를 기반으로 뇌 지도를 그리는 것인데, 이런 일이 가능한 바탕에는 비주얼 컴퓨팅이 있다. 한스피터 교수는 1,000억 개 뇌 속 신경세포의 연결 구조와 활동 원리가 담긴 뇌 지도를 뜻하는 ‘커넥톰(connectome)’을 작성하고 분석하는 커넥토믹스(connectomics)라는 학문을 연구하고 있다.
커넥톰이 완성되면 뉴런의 연결 상태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커넥톰은 이미 죽은 뇌를 이용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뇌 활동을 완벽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fMRI(funtional magnetic resonance imaging)와 같은 다양한 뇌 촬영 기술을 이용해 뇌의 기능에 따라 활성화되는 영역을 살피고 있다. 또 서로 다른 기기로 촬영한 자료들을 대조하기도 하면서 다각도로 뇌의 구석구석을 분석하고 있다.
뇌 조각 1mm3에 100만GB 정보… 빅데이터 분석 필수
뇌는 회색질과 백색질 두 부분으로 나뉜다. 대뇌피질이나 뇌 중앙에 위치한 핵이 회색질이고, 나머지 부분이 백색질이다. 회색질에 신경세포와 이를 보조하는 세포들이 분포하며, 백색질에는 신경세포 돌기인 축삭과 말이집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구조가 커넥톰의 기반이 된다.
현재 커넥톰은 실험용 쥐의 뇌로 연구하고 있다. 우선 쥐의 뇌를 꺼낸 다음 30~50nm(1nm=10만 분의 1m)로 얇게 잘라낸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얇디얇은 조각을 전자현미경으로 촬영해 한 점이 3~5nm의 해상도를 가지는 영상으로 추
출한다. 이렇게 하면 우리 눈으로 뇌 신경세포를 확인할 수 있다.
자그마한 뇌 조각이지만 정보량은 어마어마하다. 가로와 세로, 높이가 각각 1㎜인 조각에는 1PB(페타바이트) 크기의 정보가 저장된다. 1PB는 104만 8,576GB(기가바이트)다. 이 엄청난 자료들을 차곡차곡 쌓아 뇌의 각 영역의 구조와 기능을 표시하면 커넥톰을 완성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정보량을 처리해야 하므로 데이터 처리 속도 역시 빨라야 한다. 결국 빅데이터 분석 기술이 중요한 것이다. 한스피터 교수팀은 뇌 조각들이 가진 빅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 60개의 전자현미경을 병렬로 연결했다. 이 방식으로 정보처리 속도는 빨라졌고, 컴퓨터 기술의 발전으로 시간당 처리할 수 있는 정보량도 급격히 늘고 있다.
지하철 노선도를 닮은 뇌 지도 구상하다
뇌 속에 복잡하게 얽힌 뉴런의 연결 구조를 보여주려면 단순한 도표로 표현해야 한다. 여러 방법 중 한스피터 교수팀이 고른 것은 ‘지하철 노선도’다. 지하철 노선도는 역과 역이 만나는 환승역을 보기 좋게 표시해둔다. 이런 방식이 뉴런끼리 연결된 시냅스를 나타내기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하철 노선도를 바탕으로 뉴런을 표시하자 시냅스 연결이 잘 드러나는 것은 물론 뇌 지도 전체가 조금 더 균형 잡힌 모양새가 됐다.
이제 지하철 노선도 들고 도시를 여행하듯 뇌 지도를 들고 머릿속을 들여다 볼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한스피터 교수와 정원기 교수가 함께 완성한 뇌 지도를 보고 침침한 시신경에서 탑승해 퇴행성 뇌질환이 발생하는 구간으로 환승할 날을 상상해본다.
한스피터 교수는 누구?
하버드대 한스피터 피스터 교수는 전문적인 컴퓨터 지식 없이 누구나 손쉽게 GPU를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래밍 언어인 ‘비발디(Vivaldi: A Domain-Specific Language for Volume Processing and Visualization on Distributed Heterogeneous
Systems)’를 개발한 세계적인 석학이다. 이 과정에 UNIST 정원기 교수도 참여했다.
비발디는 직관적이고 쉬운 언어로 최근 대학생들에게 프로그래밍 및 컴퓨터 공학 입문용으로 가장 널리 활용되는 파이썬(Python)과 유사한 문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발디를 이용하면 GPU(graphic processing unit)에 특화된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GPU 기반의 비주얼 컴퓨팅 프로그램을 구현할 수 있다. 지난해 미국 컴퓨터학회 조사에 따르면 비발디는 파이썬과 자바(JAVA)를 넘어 미국 대학생에게 프로그래밍 및 공학 입문용으로 가장 많이 활용되는 것으로 조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