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ST의 캠퍼스에는 7천년간 내려온 비범한 사연이 몰려 있다. 사연을 엮은 대표적 인물은 두 개의 국보 암각화를 남긴 선사인, 화랑도와 신라왕족, 원효대사와 겸재 정선 등이다. 그리고 이들이 만든 사연의 핵심은 모두 신성한 교육에 귀결된다. 이런 일치는 이 장소가 지닌 필연적 결과라고 볼 수 있다.
UNIST가 들어선 울산광역시 울주군 반연리는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 옆이다. 대곡천은 이름이 시사하듯 영월 동강과 같은 큰 물돌이가 여러 개 이어진 계곡이다. 이곳에는 자연이 만든 대표적 기하학이 내재돼 있고, 음과 양이 대응하는 땅의 철학이 있다.
가령 물이 흐르는 여러 개의 물굽이 총 길이를 측정한 값에 물길이 시작하는 지점과 끝나는 지점의 직선거리 값을 나누면 파이 값인 3.14다. 또 곡선이 만드는 요철(凹凸)형 지형은 태극무늬를 연상시킨다.
한반도 문화의 첫 장을 연 암각화
이 지형에 가장 먼저 주목하고 사연을 만든 사람들은 선사인이다. 이들은 7천년 전 대곡천 하구와 연결된 옛 울산만에서 고래를 잡았다. 이들이 대곡천에 주목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깊고 굽어진 계곡에 특별한 인상을 받았으리란 추정이다. 비상하게 깊었기 때문에 동굴로 여겼을 수도 있다. 동굴 덮개 대신 계곡 양쪽에 원시림이 아치 형태로 펼쳐진 모습을 상상하면 이해하기 쉽겠다.
구절양장처럼 굽어진 이 계곡에 주목한 선사인들은 암벽을 쪼아 그림을 새겼다. 그것은 한반도 문화의 첫 장을 연 가장 큰 사건이었다. 수십마리의 고래와 인물, 동물 형상을 구체적으로 새겼다. 그것이 사실적 수법으로 그린 반구대암각화다. 이 그림바위에서 3km쯤 상류에는 태양이나 번개 같은 거대하고 놀라운 형상을 압축상징해서 그림을 새겼는데, 그것이 추상적 수법으로 그린 천전리암각화다.
이 두 바위그림은 각각 국가보물로 지정됐다. 한반도의 문화원형으로서 모든 문화예술의 근원적 출발이 된다. 그림은 무엇인가, 신앙은 무엇인가, 한글은 어떻게 생겨났나를 깊이 이해하려면 이 바위그림 곁에 와봐야 한다.
암각화 학자인 동북아역사재단 장석호 박사는 ‘대곡천 바위에 새긴 그림이 오늘날 파워포인트(PPT)와 같고 그 주위는 교회나 학교와 같다’고 말했다. 이렇게 시작된 대곡천의 교육기능은 그 뒤에도 이어졌다.
화랑, 원효, 포은, 겸재…. 시대의 지성이 주목한 곳
선사 이후 역사시대에 들어서자 대곡천에는 신라 화랑과 왕족들이 찾았다. 그들은 이 계곡에서 삼한통일과 불국토를 꿈꾼 흔적을 바위에 문자로 남겼다. 이 장소가 갖는 신성한 기운에 힘입어 심신을 단련하고, 불교융성을 통해 일관된 가치관을 얻으려 했다.
한편 원효대사는 대곡천 반고사란 암자에서 지금으로 치면 융합학문이라 이름할 ‘원륭회통’(圓融會通)에 관한 논문을 집필했다. 그들은 삼한통일이란 대업을 완성하고 불국토 사상을 확립했다. 대곡천은 수천년간 엄중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이행하는 수련장이며 도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 때는 포은 정몽주 선생이 이 골짜기를 방문해 후학들에게 귀감을 남겼다. 그 흔적이 이 골짜기에 세워진 반고서원이다. 조선시대에는 유학자들이 대곡천에서 구곡(九曲)이란 학문적 이상향을 경영했다. 이것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뜬 것으로 한국에 몇 개 안되는 구곡경영의 자취다. 비슷한 시기 대곡천에는 천재화가 겸재 정선이 찾아와 한 폭의 그림을 남겼다.
대곡천은 한국문화의 원형(archetype)을 갖추고 각 시대가 요구하는 수련과 연구소 역할을 한 것이다.
비범한 상상을 자극하는 문화지리
그리고 2009년 이곳에 UNIST가 설립됐다. 캠퍼스가 입지한 곳은 대곡천 옆 산속이다. 결과적으로 이곳에 입지한 것은, 어떤 신성한 장소는 한번 결정되면 세월에 따라 변형될지언정 쉽게 없어지지 않는 통례에 따랐다고 볼수 있다.
큰 바위, 깊은 샘, 우거진 숲이 있는 곳은 대체로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전통신앙의 싹을 틔웠고, 그 뒤에는 교회나 학교, 또는 공공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흔히 본다. UNIST 캠퍼스는 그런 점에서 대곡천이 지닌 유구한 교육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대곡천의 오늘날 아이콘은 두 개의 암각화다. 암각화에는 동물학, 분류학, 인류문화학, 도형학의 초보적 형태가 표현돼 있다. 그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비범한 고안이었다. 이와 같은 커다란 진보를 퀀텀 점프 즉 양자도약이라 부른다. 우리가
대곡천 계곡을 걸으며 생각할 것은 기호와 도상의 해석만이 아니다. 그보다 선사인이 도약한 것과 같이 비범한 착상을 끌어내는 것이다.
UNIST에서 이루어질 고래처럼 크고 힘찬 도약
이제 철기와 세라믹 병용시대를 넘어설 그래핀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한다. 그라파이트 즉 ‘그리다’란 뜻을 가진 흑연에서 추출한 그래핀은 강철보다 100배 강하고 구리보다 전기전도율이 수십배 크다고 한다. 앞으로 이 소재를 누가 선점하느냐에 국제산업 판도가 바뀐다는 것이다. 이 연구에는 세계 유수의 연구기관이 뛰어들었고, 그 가운데 UNIST가 선두권에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선사시대 고래를 잡기 위해 배를 만들던 대곡천 후예들은 오늘날 세계 제일의 조선공업을 일으켰다. 고래기름을 열매(熱媒)로 철광석을 녹여내던 그 후예들이 굴지의 제철소를 경영한다. 이런 맥락에서 UNIST의 앞날은 희망이 크다. 앞으로 2030년 세계 톱 10 대학에 드는 목표달성은 물론 인류가 당면한 신소재, 에너지, 기후 분야에서 국보적 위상을 갖추리라는 기대도 그래서 생겨나는 것이다.
김한태 사단법인 문화도시울산포럼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