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도시계획 분야의 대표 뉴스 웹사이트인 ‘플레니티즌(Planetizen)’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 이론가 100명을 발표했다. 근대에서 기원전 500년의 도시계획가(Hippodamus)까지 총 망라했던 조사에서 당당히 1위에 꼽힌 이는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였다. 도시계획을 전공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놀랍지 않은 결과이지만, 다른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는 그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을 탐구해 세상을 놀라게 하는 과학적 발견을 이루고자 하는 이들을 과학자라 부른다면, 제인 제이콥스는 과학자는 아니다. 그러나 과학의 정의를 확장해 일상에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현실을 일깨워주는 사람도 과학자라 부를 수 있다면 그녀는 분명 과학자, 그중에서도 사회를 탐구하는 사회과학자였다.
사회과학자들이 경험하는 발견 또는 일깨움의 순간은 자연과학자의 그것과는 다소 다를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역사적 지식,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이해, 사회 현상에 대한 상식은 나를 구성하는 일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러한 것들이 철저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의 상식을 파괴해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것을 새로이 세울 때 사회과학자들은 발견의 희열을 느낀다. 제인 제이콥스는 1960년대와 그 이전 시기를 지배한 도시계획가의 상식을 뒤엎고, 도시를 이해하는 전혀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도시 이론가이자 혁명가였다.
도시다움은 무엇인가
도시계획가는 도시를 도시답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도시다움은 무엇인가? 혹은 도시라고 한다면 무엇이 머리에 떠오르는가? 대도시의 마천루, 자동차로 북적이는 광대한 도로, 웅장하고 휘황찬란한 기념비들…. 1960년대까지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을 도시다움으로 여겼다. 위대한 근대 건축가이자 도시 이론가였던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도시 모델이 이러한 근대 도시계획의 상식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35년 르 코르뷔지에는 “빛나는 도시” 계획안을 발표했다. 이름에 걸맞게 도심은 초고층건물의 숲으로 이루어졌고, 직선으로 펼쳐진 넓은 도로와 노면 전차, 각종 복합 쇼핑 시설, 교외의 넓은 공원은 기계적이고 조직화된 도시다움의 상징이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빛나는 도시는 당대 최고의 발명품이라 할 수 있었고, 도시계획가들은 앞 다퉈 그의 도시 모델을 신도시에 구현하려 했다. 그러한 도시다움을 갖추지 못한 녹슨 창틀, 색 바랜 페인트가 드러나는 오래된 주거지역을 번쩍이고 화려한 도시다움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당시 도시계획가의 사명이었다. 필자 역시 1980년대 후반, 1기 신도시 사업의 화려함에 매료돼 그러한 도시를 만들어보겠다고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도시다움의 핵심은 다양성
하지만 생각해보라. 오래된 도시의 낡은 모습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힘겹고 불편하게 만드는지. 도시민의 삶을 공허하게 만드는 것은 생명력을 잃은 도시 공간, 안전하지 못한 거리, 단절된 인적 네트워크다. 도시를 도시답게 만드는 것은 질서정연한 건축물이나 광활한 도로가 아니라 다양하고 역동적인 사람들의 행위와 관계다.
제인 제이콥스는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다움과 대척점에 있는 도시성을 보스톤의 슬럼가에서 찾았다. 외견상 허름하고 때로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보스톤의 슬럼가는 놀라울 만큼 활기차고 복합적인 인적 네트워크에 의해 매우 안전하고 건강한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있었다. 자동차가 지나가기에 도로가 좁다는 이유로 또는 낡고 허름한 건물이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이러한 동네를 “빛나는 도시”로 탈바꿈하려는 시도는 도시에 대한 약탈이다.
도시계획의 역저라 할 수 있는 <미국 대도시의 삶과 죽음(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에서 그녀는 매우 다정하게 도시의 현실을 관찰해 단호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한다. 도시다움의 핵심은 다양성이다. 다양한 직업, 다양한 활동, 다양한 사람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활력 있는 도시 공간을 만들어가는 것이 도시다움의 정수다. 이를 위해 오래된 커뮤니티를 보호하여 새 것과 어울리도록 하고, 작은 도시블록과 도로로 구성된 도시 공간을 만들며, 주거, 쇼핑, 일을 한 곳에서 할 수 있는 복합용도 도시개발이 필요하다.
열정과 애정이 발견한 새로운 가치
선구자의 통찰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더해진다. 우리가 생각했던 도시에 대한 상식을 파괴하는 그녀의 외침은 처음에는 미약해 보였지만, 현대에 이르러 특히 선진국의 도시를 이해하고 비전을 설정함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서구의 도시개발 트렌드인 신도시주의(New Urbanism), 대중교통지향형 개발(Transit Oriented Development), 지속가능한 교통수단(Sustainable Transportation)은 모두 제인 제이콥스의 원칙을 따른다. 대한민국 도시재생의 이론적·철학적 기반 역시 제인 제이콥스의 도시론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역설적이지만 제인 제이콥스는 도시계획에 대한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새로운 것의 창조는 때로 이렇게 발생한다. 당시 전문성과 이론으로 무장한 수많은 도시계획가들이 보지 못했던 도시의 가치를 발견한 제인 제이콥스의 특별함은 도시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이었다.
필자가 도시계획 공부를 시작한 지 20여 년이 지났다. 매일 학생들과 씨름하며 새로운 연구와 논문을 쓰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러한 작업들의 축적이 그녀가 이룬 인류에 대한 공헌에 비견될 수 있을지 스스로 반문해 본다. 자신이 다루는 연구 대상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애정 어린 시각을 갖고 있는 연구자가 진정한 사회과학자의 우상이다.
글 도시환경공학부 조기혁 교수
조기혁 교수는 도시가 갖고 있는 물리적인 문제들을 진단·평가하고 이를 완화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과학적이고 계량적인 방식으로 도시 현상과 문제들을 분석하고, 지속가능하고 안전한 도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정책을 제안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