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인류는 아주 작은 병으로도 쉽게 생을 마감했다. 당시 사람들의 수명은 지금보다 짧았다. 역사는 사람들이 오래 머물길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누군가 그 시간을 조금씩 늘리려고 한다. 인류는 한 뼘 더 허락된 시간 안에서 밤하늘과 별을 볼 수 있을까.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있는 바탕에 ‘유전체(genome)’가 있다. 흔히 ‘생명의 설계도’라고 부르는 유전체는 한 생물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유전물질(DNA)이 뭉쳐진 존재다. 우리 몸의 세포 하나만 분석해도 알 수 있는 이 설계도는 질병 치료와도 연관된다.
오래도록 건강한 삶을 사는 데 도움을 줄 ‘유전체 안정성 연구’의 선봉에 UNIST 생명과학부 명경재 특훈교수가 있다. 지난해 12월부터 UNIST에 둥지를 튼 그는 출발부터 화제를 모은 인물이다. 미국 국립보건원(NIH) 종신연구원까지 내려놓고 한국행을 택했기 때문이다. IBS 유전체항상성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그의 연구에 대해 들어봤다.
“DNA도 손상된다”… 유전체 항상성을 지켜라!
“DNA 복구와 게놈 안정성 연구가 각광받게 된 건 1945년 8월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였어요. 방사능에 피폭된 히로시마 사람들을 조사해보니 그들 모두 DNA에 변화가 생겼다는 걸 발견한 거죠.”
명경재 교수는 유전체 항상성 연구가 시작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원자폭탄의 피해를 보기 전까지 사람들은 DNA가 변함없이 보전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실제 DNA는 외부 요인뿐 아니라 방사선이나 해로운 화학물질에 노출돼도 문제가 생긴다. 심지어 DNA 복제 중에도 알게 모르게 실수가 생길 수 있다.
“보통 DNA는 세포 내에서 이런 문제나 에러를 복구해 항상성을 유지해요. 유전체 차원에서 항상성을 유지한다는 건 DNA가 정상적으로 복구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복구 과정에서 잘못되면 돌연변이가 나타나고, 때로 암 같은 것이 생기기도 한답니다.”
DNA가 손상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생명체 보전 기능을 더 깊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유전체 안정성이 깨지면 암과 유전병 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암과 유전병 환자들의 DNA를 살펴보니 대부분 복구 과정이 고장 나 있었던 것이다.
“DNA 손상에는 염기 고장이 있을 수도 있고, 이중나선이 끊어져서 몸 속 산화제가 DNA를 공격한 경우도 있어요. 제가 관심 있었던 건 나선이 완전 부러지는데, 그게 다른 염색체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었어요. 그걸 전좌(轉座, translocation)라고 합니다.”
전좌는 이중나선의 절단된 부분이 다른 염색체와 결합하면서 염색체의 형태를 바꾸는 현상이다. 명 교수는 이런 현상이 왜 생기고, 막으려면 어떤 기작(mechanism)이 필요한지 연구했다. 화학 합성체(compound)들을 연구하면서 그것들이 얼마나 특정 DNA의 복구 과정이나 게놈 안정성에 영향을 미치는지도 추적했다.
그의 노력은 2001년 <셀>에 발표한 논문 한 편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 논문은 효모에서 전좌를 비롯한 ‘총체적 염색체 재배열(Gross Chromosomal Rearrangement, GCR)’ 현상을 파악하고 세포 내에서 이 현상을 어떻게 조절하는지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담고 있다.
최고의 연구 환경에 세계적 인재 모인다
<셀>에 발표한 명 교수의 논문은 유전체 완결성 분야의 대표적 연구로 평가받는다. 이 논문 한 편으로 그는 석학의 반열에 올랐고 NIH에서 종신연구원도 보장받았다. 그런 그가 안정된 자리를 박차고 UNIST에 뿌리를 내렸다. 무엇이 그를 UNIST로 이끌었을까.
“조금 더 집중할 수 있는 공간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싶었어요. UNIST의 제안을 받아 직접 와보니 정말 좋았습니다. 총장님을 비롯한 젊은 교수진, 그리고 학생들의 열정이 느껴졌어요. 기자재를 비롯한 연구 환경도 정말 훌륭했고요. 이런 곳이라면 제대로 연구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한국 학생들에게 연구 측면에서 도움이 되고픈 마음도 있었고요.”
명경재 교수는 현재 DNA 복구와 복제 등에 대한 기초적인 분야에 집중하고 있다. 예를 들어 DNA에 손상이 있을 때 세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피고, 연구에 필요한 중요한 단백질과 유전자를 찾는 연구 등을 진행한다.
“우리가 찾은 단백질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분자 수준에서 연구하고 있어요. 화학 합성체 중에 DNA 손상과 관련 있다고 예상되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300개가량 찾아냈는데요. 이것들이 암이나 노화에도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피고 있습니다.”
그가 연구를 해나가는 데 UNIST라는 환경은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엄청난 기자재를 보유하고 있는 데다 그걸 공용화하는 시스템까지 갖춘 덕분이다. 고가의 기자재를 다룰 수 있는 전문가를 뽑고, 사용자들을 꾸준히 교육함으로써 연구 효율성도 높였다는 게 명 교수의 분석이다.
“MIT나 하버드대, 서울대 등에도 좋은 기자재는 많아요. 하지만 그런 기자재는 대부분 아주 소수만 사용하도록 허락돼 있습니다. UNIST는 달랐어요. 총장님의 마인드 자체가 좋은 연구 기자재를 좀 더 많은 이들이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였으니까요.”
좋은 과정 없이는 좋은 결과도 없다. 설립 때부터 명확했던 UNIST의 비전이 좋은 환경을 만들었고, 그 환경이 좋은 인력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비치는 자신감과 긍정의 에너지가 지금 UNIST의 큰 동력이 되고 있다. 명교수와 그가 이끄는 연구단이 이 사실을 증명한다.
오래도록 행복한 삶을 꿈꾸며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있었다. 모든 노력과 땀에는 필히 목표가 있게 마련. 명경재 교수가 꿈꾸는 과학은, 그리고 그가 그리는 세상은 어떤 곳일까.
“제가 가장 원하는 건 암이나 질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드리는 겁니다. 생명 연장이 최종 목표는 아니에요. 사람들이 연장된 삶 속에서 행복해야 하니까요. 중요한 건 질병이나 노화가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최소화해 오래도록 행복하도록 돕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명경재 교수는 지금까지는 IT 산업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많이 바꾸었지만, 이제는 생물학적 기술(Biological Technology, BT)이 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BT로 인해 세상이 많이 변하게 될 겁니다. 이미 많은 기술적 발전을 이룬 IT와 접목한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이 될 수 있겠지요. 항암제 개발, 화장품 개발, 식량, 사람들이 사용하는 온갖 제품 등에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연구자들이 더 노력해야 하지요. 신물질도 많이 개발되고 있는데 이런 물질들이 기업의 제품과 잘 결합한다면 인류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했던 역사를 거친 인류는 이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변화와 마주하게 됐다. 그리고 이제는 큰 숙제들이 우리 앞에 있다. 인류 평생의 숙원이라는 암 치료와 노화 지연, 그리고 생명 연장의 꿈이다. 지금도 명경재 교수와 연구단은 인류의 비밀을 풀기 위해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Myung’s Advice] 틈날 때마다 책을 봐야 하는 이유
명경재 교수처럼 다방면으로 소통하는 창조적인 과학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더 많은 실험? 과학 공부에 더 많은 시간 할애하기? 둘 다 틀렸다. 그가 창조적인 과학자의 조건으로 꼽은 건 ‘독서’였다.
“학생들에게 시간날 때마다 책을 많이 보라고 권해요.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들여다보라는 거예요. 창조적인 생각이라는 건 결국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어내고, 그걸 자기 생각과 조합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거라고 생각해요.”
명 교수는 지난 7월 23일 UNIST에서 열린 ‘2015 인문학 페스티벌’에서 찰스 다윈 이야기를 꺼냈다. 다윈이 멜서스의 <인구론>을 읽다가 아이디어를 얻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진화론>을 썼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책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이 날 강연에서 학생들에게 ‘열정의 25%를 인문학에 투자하라’고도 강조했다. 연구를 하는 과정뿐 아니라 연구를 완료한 이후에도 인문학은 꼭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굉장한 발견도 결국 페이퍼에 써서 발표해야 해요. 엄청난 내용이라 하더라도 글로 잘 표현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어려워요. 경영 측면으로 봐도 그래요. 혼자 연구실에서 실험하던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습니다. 이제는 점점 그룹을 만들어서 연구하는 경우가 많이 생길 거예요. 그렇다면 그 그룹 내에서도 결국 중요한 건 상대방의 생각을 읽고 이해하고 또 소통해야 하거든요.”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고 모으는 과정. 결국 그 모든 과정이 좋은 연구로 이어진다는 게 명 교수가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다.
[Introduce Schools] 생명과학부
생명과학부에서는 융합연구와 교육을 바탕으로 21세기 인류가 직면한 문제(지속가능한 에너지 생산과 이용, 의학 진단 혁신, 새로운 나노재료의 개발, 암 같은 질병의 치료를 위한 의과학연구 등) 해결에 기여할 인재를 배출하고자 한다. 학부 및 대학원 과정의 학생들이 화학과 생물, 물리학, 재료과학, 나노과학 등이 어우러진 학제 간 융합연구 환경에서 교육과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UNIST 내에 있는 올림푸스 이미징 센터(UOBC), In-vivo 연구센터, 한스 쉘러 줄기세포 연구센터 등이 세계적 수준의 바이오 연구와 교육을 뒷받침하고 있다. 최근에는 생명과학부의 두 트랙 모두 BK21+ 프로그램 유치에 성공해 장학금 및 해외공동연구 지원 등 대학원생들을 위한 우수한 연구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생명과학부의 학부생들은 학부 연구 프로그램을 통해 UNIST 및 UC-Irvine, U of Michigan, Ann Arbor and Univ. of North Carolina at Chapel Hill 등 해외 대학에서
의 다양한 연구에 참여할 수 있다.
졸업 이후 UNIST 대학원이나 타 대학원에 진학해 깊이 있는 연구를 할 수 있다. 또한 한국생명공학연구원과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 질병관리본부, 국립보건원,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국립환경연구소 등의 정부 주도 연구소가 생명과학부 졸업생들에게는 좋은 길이 될 수 있다. UNIST 생명과학부 졸업생들은 생명과학과 바이오테크놀로지, 생체재료, 제약, 의료기기 등의 분야에서 파급효과가 큰 산업 분야를 이끌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