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ST 신소재공학부 펑 딩(Feng Ding) 특훈교수는 올해로 한국 생활 2년차다. 그럼에도 인터뷰 내내 차분하게 답하는 모습이 한국에 오래 산 사람 같다. 환경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 성격인 걸까. 아니면 연구에 몰입해 살다 보니 주변에 신경 쓸 시간이 없는 걸까. 이처럼 조용해 보이는 펑 딩 교수가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됐는지 문득 궁금해져 질문을 했더니 뜻밖의 대답을 한다.
“글쎄요. 어쩌다 보니 한국까지 오게 됐네요. 아무튼 지금 생활에 만족합니다.”
펑 딩 교수의 인생행로는 ‘어쩌다’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자신은 오롯이 연구에만 매진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서 그의 자리를 마련해줘 결국은 한국의 UNIST까지 오게 됐다. 본인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주변에서 알아서 동분서주했다는 건 그의 실력뿐만 아니라 인적 네트워크도 탄탄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범대 교수 대신 연구원의 길로
1970년 중국 동북부 산둥성의 소도시에서 태어난 펑 딩은 집(사실은 나라)이 워낙 가난해 어린 시절 읽은 책이 거의 없었다. 아버지가 중학교 교사임에도 월급이 10달러도 안 됐기 때문이다(물론 당시 물가를 고려하면 1만 원보다는 훨씬 큰돈이었을 것이다). 문득 수년 전 본 장예모 감독의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이 떠올랐다. 시대적 배경이나 젊은 교사가 주인공인 점등 마치 펑 딩의 어린 시절 환경을 본 것 같다.
펑 딩이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중국은 당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과학을 높이 평가하고 과학자를 존경했다. 과학이 낙후된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펑 딩 역시 마찬가지였고 다행히 수학과 물리를 꽤 잘해 소수에게만 문이 열려 있던 대학에 갈 수 있었다.
“그때는 정보가 많지 않았어요. 담임 선생님이 보여준 몇몇 대학 가운데 고른 게 화중과학기술대학 응용물리학과였습니다.”
대학에서 좋아하는 수학과 물리를 실컷 공부할 수 있었다는 펑 딩은 이때부터 뭔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즉 백지 몇 장만이 놓여 있는 널찍한 책상을 앞에 두고 앉아 연필로 수식을 써가며 연구하는 전형적인 이론물리학은 이제 한계에 이르렀고, 앞으로는 컴퓨터가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사실 오늘날 컴퓨터 시뮬레이션 연구에 널리 쓰이는 방법인 밀도함수이론(Density Functional Theory)이 개발된 게 1960년대 후반이므로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이라면 이런 생각을 떠올릴 만하다. 하지만 당시 중국에서는 대학 전체에 컴퓨터 한 대가 있는 수준이었다.
펑 딩은 대학 졸업 뒤 상하이의 푸단대 물리학과 대학원에 들어가 초전도현상에 대한 이론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주로 통계역학 연구로 연필을 사용한 분석적 방법이었다. 1996년 펑 딩은 공자의 고향인 산둥성 취푸의 취푸사범대학의 교수가 됐다. 당시 중국은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많지 않은 때라 석사 학위만으로도 대학교수가 될 수 있었다.
2년 정도 예비 교사들에게 물리를 가르치던 펑 딩 교수는 학문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난징대 물리학과의 문을 두드렸다. 취푸사범대학의 배려로 딩교수는 학위 과정을 마칠 때까지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1998년 펑 딩은 다시 대학원생이 됐고, 응집물질물리학의 한 분야인 나노 클러스터(Nano Cluster)를 연구하며 본격적으로 컴퓨터 시뮬레이션 연구를 시작했다. 학부 시절의 꿈이 마침내 현실이 된 것이다.
사범대 교수를 하던 2년 동안 틈틈이 코딩 공부를 해온 펑 딩은 어렵지 않게 시뮬레이션 연구에 적응할 수 있었다. 2002년 박사 학위를 받고는 취푸사범대로 돌아가 학생들을 가르치며 틈틈이 연구를 병행하던 펑 딩 교수는 한 컨퍼런스에서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안네 로슨 교수를 만나 얘기를 나누게 됐다. 당시 탄소나노튜브의 시뮬레이션 연구를 하고 있던 로슨 교수는 연구원 자리를 제안했고, 펑 딩은 보다 나은 연구 활동을 하기 위해 안정적이었던 교수직을 뒤로 하고 2003년 스웨덴으로 떠났다.
공동 연구팀만 20여 개… 50명의 석학과 네트워크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탄소나노물질을 연구하기 시작했죠. 벌써 15년이 됐네요.”
펑 딩 박사는 촉매에서 탄소나노튜브가 자라는 과정을 시뮬레이션으로 밝히는 연구를 진행했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밀도함수이론은 개별 전자가 아니라 물질 표면의 전자 밀도와 에너지 분포를 계산하는 방법이다. 많은 원자들에 분포된 전자들을 이용해 물질의 특징을 시뮬레이션하는 데 유용하다. 2년 동안 스웨덴에서 많은 걸 배운 펑 딩은 보리스 야콥슨의 주선으로 나노 연구의 메카인 미국 라이스대로 옮기게 된다.
1985년 라이스대의 화학자 리처드 스몰리와 로버트 컬은 영국 서식스대의 화학자 해럴드 크로토와 함께 풀러렌(Fullerene)을 발견해 나노시대의 문을 열었다. 풀러렌은 탄소 60개가 축구공 무늬의 꼭짓점 자리에 배치한 공 모양의 분자다. 탄소로만 이뤄진 구조는 흑연과 다이아몬드가 전부인 줄 알았던 당시 풀러렌의 발견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뒤이어 1991년 일본 연구자들이 탄소나노튜브를 발견했다. 풀러렌을 발견한 세 사람은 1996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제가 라이스대에 간 그해에 안타깝게도 스몰리 교수가 62세로 세상을 떠났죠. 그분을 직접 보지 못한 게 지금도 아쉽네요.”
펑 딩 박사는 보리스 야콥슨이 운영하는 연구실에서 4년 동안 연구원으로 지냈다. 야콥슨 교수는 고(故) 스몰리 교수의 친한 동료이자 탄소나노물질 시뮬레이션 연구 분야를 이끌고 있었다. 펑 딩 박사는 이곳에서 탄소나노튜브의 성장 조절 등 여러 측면에서 많은 연구를 수행했고, 저명한 학술지에 논문 여러 편을 실었다.
“어느 날 야콥슨 교수가 부르더니 홍콩폴리텍에 가면 어떻겠냐고 하시더군요. 사실 미국에 자리 잡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교수님 제안이라 고맙게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2009년 펑 딩은 6년 만에 아시아로 돌아왔다. 그런데 펑 딩 교수가 자리한 곳은 섬유의류학과였다. 물론 섬유를 확대해보면 나노구조라 그의 전공과 관련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분명 낯선 도전이었다. ‘가르치기 위해’ 배워야 할 것도 많았다.
“학생들이 패션쇼도 하고 나름 재미있는 생활이었습니다. 또 제 연구가 컴퓨터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다른 곳의 여러 연구자들과 함께 연구를 계속해 나가는 데도 문제가 없었죠.”
탄소나노물질 실험을 하는 연구자에게 컴퓨터 시뮬레이션 연구는 관찰한 현상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기 때문에, 이 분야 전문가인 펑 딩 교수는 공동 연구자로 인기가 높았다. 즉 시뮬레이션에서도 실험이 재현되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들기 쉬웠고, 때로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새로운 실험을 설계하는 데 영감을 주기도 했다.
이 시기 나온 많은 연구결과 가운데 대표적인 게 2014년 6월 학술지 <네이처>에 베이징대 연구자들과 공저자로 게재한 논문이다. 텅스텐 나노촉매로 특정한 탄소나노튜브를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다는 내용으로, 펑 딩 교수팀의 시뮬레이션 결과도 실험과 일치했다. 3년이 지난 2017년 3월 연구자들은 이 방법을 확대한 후속 연구결과를 역시 <네이처(Nature)>에 발표했다. 펑 딩 교수가 UNIST로 옮긴 직후였다.
앞으로는 실험연구도 병행하기로
2015년 여름 야콥슨 교수는 UNIST 자연과학부의 로드니 루오프 교수를 방문했다. 기초과학연구원(IBS) 다차원 탄소재료 연구단의 단장이던 루오프 교수는 이론 그룹을 이끌 적임자를 찾고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야콥슨 교수는 적임자로 펑 딩 교수를 추천했다. 홍콩 생활도 나름 만족스러웠지만 아무래도 강의 부담이 컸던 펑 딩 교수는 이번에도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2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루오프 교수는 펑 딩 교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최근 발표한 논문들에서 펑 딩 교수팀의 시뮬레이션 결과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저명한 물리학 저널인 <피지컬리뷰레터스(PRL)>에 실린 그래핀 버블(Graphene Bubble) 논문이 대표적인 예다.
그래핀 면의 가운데가 볼록해 ‘엠보싱 그래핀’으로도 불리는 그래핀 버블은 평면 그래핀에 비해 화학 반응성이 커 쓸모가 많을 것이다. 펑 딩 교수팀은 그래핀 내부의 온도를 계산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지난 4월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된 ‘휘는 다이아몬드’ 연구는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가장 단단한 물질인 다이아몬드를 결함이 없는 단결정으로 만들 경우, 나노 크기에서 눌러도 부러지지 않고 휘어지며 버텼기 때문이다. 펑 딩 교수는 부러지기 직전 최대 힘(인장 응력)을 계산했고, 실험 결과도 이에 근접했다.
UNIST에서 펑 딩 교수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컴퓨터의 가상공간이 아니라 현실공간에서 하는 실험도 병행하기로 한 것이다. 시뮬레이션 결과를 바탕으로 흥미로운 현상을 예측하더라도 실험으로 검증하기 위해 매번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게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아직은 작은 규모지만 실험에 대한 그의 기대가 느껴진다.
“탄소는 자연에서 가장 중요한 원소입니다. 우리 몸을 비롯해 주위의 거의 모든 것들이 탄소를 기반으로 이뤄져 있지요. 탄소는 구조가 간단하면서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문제 하나를 해결할 때마다 새로운 문제들이 여럿 생겨나니 연구거리가 떨어질 일도 없어요. 앞으로도 탄소의 매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글_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는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며 <강석기의 과학카페>,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를 저술했으며, 옮긴 책으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가 있다.